<25>산방산 바위는 희고 단단하고 결이 잘아 비석으로 제격
<25>산방산 바위는 희고 단단하고 결이 잘아 비석으로 제격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비석돌 산지-남원 걸세오름은 정의현 중심으로 제주목 동쪽에 비석 공급
한라산 남쪽·김녕 등에서는 드물게 현무암이나 송이를 이용
▲ 지게와 등짐으로 비석돌을 운반하는 모습.

▲비석돌을 캐던 제주의 오름


제주는 현무암 지대가 넓게 분포돼 있어서 비석을 만드는 돌아 부족하였다, 그래서 강도가 약하지만 구멍이 없는 조면암을 비석의 재료로 삼은 것이 오늘날 무덤에 세워진 흰 빛나는 비석들이다. 제주의 비석 산지는 옛 대정현(현, 안덕면 화순리)의 산방산과 영락리의 돈대악, 그리고 정의현(현 서귀포시 남원읍 하례리)의 걸세오름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비석돌 산지인 산방산에는 지금도 곳곳에 돌을 채취하던 알기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한때 융성했던 비석들이 녹슨 돌망치, 정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다. 오늘날은 비석돌 캐는 사람의 흔적이 끊기고 마소와 약용 염소떼가 줄어든 산방산 자락에는 잡목들과 소나무만 키가 크고 있다. 1970년대만 해도 산방산 뒤편 자락은 완만한 지형이고 잔디도 좋아 인근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소풍 장소로 이용되곤 했었다.  


옛 기록에는 산방산이 제주의 비석 산지 가운데 유일하다고 전해온다. ‘순해록(循海錄)’에 ‘고을에서 동서로 수 백 리 사이에 있는 바위는 모두 검은 빛에 물방울 구멍같이 뚫린 모양이지만, 유독 이 산(필자 주·산방산)의 돌만 단단한 흰색으로 결이 잘고 치밀하여(堅白密緻) 무덤의 비석으로 쓸 수가 있다’라는 구절이 있다. 비석을 새기려면 구멍이 없어야 하고 글자를 잘 새길 수 있어야 하므로 산방산돌이 적격임을 옛사람들이 놓칠 리 없었다.   


산방산은 해발 395m로 산방산은 멀리서 보면 마치 모자를 땅에 놓은 것처럼 하늘을 향해 불룩하게 튀어나온 조면암 산이다. 산방산은 전체가 가파른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특히 산 앞면 주상절리대에 풍화혈(tafoni)이 발달한 중턱에 산방굴사가 있어 신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전체가 암벽으로 이루어진 산방산은 지네발난과 같은 희귀한 암벽 식물이 자라고 있어 산방산 암벽식물지대는 천연기념물 제376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산방산의 형상은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금형산(金形山)이다. 마치 종을 엎어 놓은 것 같은 형태로서 눌(노적단)과 같이 들판에 곡식을 많이 쌓아 둔 모양처럼 보인다고 하여 부봉사(富峰砂)라고 하며, 산이 청명한 기운이 흐르면 큰 사업가, 충신, 부자가 태어난다고 한다. 산의 성격은 둥글고 맑은 편이다. 혹자는 산방산이 마치 붓처럼 보인다고 하여 문필봉이라고도 한다.


걸세오름은 서귀포시 남원읍 하례리에 있는 오름인데 표고 158m로 효돈천을 끼고 있다. 오름 서쪽 절벽에는 비석돌을 채취하던 알기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 산방산 비석돌이 서촌(대정현)을 중심으로 제주시(제주목) 서쪽까지 공급됐다면, 걸세오름 돌은 동촌(정의현)을 중심으로 제주시(제주목) 동쪽으로 비석과 동자석의 재료로 공급됐다. 비석돌은 글자를 새기지 않고 달구지를 이용하여 제주 전역에 공급되면 해당 지역에서 글씨를 새겨 비석의 수요를 맞추었다. 

 

▲ 돈두악 조면암으로 만든 동자석.

돈두악은 현 행정구역상 서귀포시 대정읍 영락리에 있다. 돈두악은 나지막한 동산처럼 보이는 오름으로 잘 알려지지 않는 비석돌 산지이다. 주변의 비문에는 오름의 지명이 돈돌악(敦突岳) 혹은 돈두악(敦頭岳)이라고 표기돼 있고 한글로는 돈대미, 돈두미라고 전한다.


이 오름은 매우 작은 규모로 표고 41.9m, 비고 22m 높이에 불과한데 바다 가까이 나지막하게 누워있어 늘 생각했던 봉긋한 오름과는 달리 큰 언덕쯤으로 보인다. 돈두악의 둘레는 1571m, 면적은 11만6242㎡로 주변 곳곳에 누르스름한 빛의 조면암 조각이 널려있다. 돌담이나 산담 또한 조면암으로 이루어져 초록의 소나무와 흙빛의 밭에 대비돼 희게 보일 정도다.


▲기억으로만 전해지는 비석


영락리 주민에게 돈두악의 옛일을 물었더니, 비석 만들던 시기는 자신이 12살 때라고 하면서 비석돌을 만들던 장소만 알고 있었고, 당시 직접 채취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고 했다. 자신도 이곳에서 비석을 만들었다는 것을 마을에서 들었다고 전했다(김부남·1944년생).  돈두악의 산담을 유심히 살펴보니 비석을 만들다가만 비석돌이 산담 위나 올레의 정돌로 놓여 있었다. 비록 산지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돈두악 지반(地盤)은 조면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돈두악의 비석돌 채취와 관련된 기록이 ‘영락리지(永樂里誌’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진주강씨(晉州姜氏) 은열공파(殷烈公派) 13세 후손 강윤희(姜允熙) 공은 제주도 입도조인데, 입도조 16세손 봉호가 애월읍 봉성리에서 영락리 1352번지로 이주 정착하였으며, 입촌 후 비석 제작업에 종사하면서 동네 사람들에게 비석을 무료로 조각해 주는 등 많은 봉사를 했다’라고 한다. 


돈두악에서 언제부터 비석돌을 채취했는지 알기 위해 돈두악 정상 남동쪽으로 향해있는 오래된 무덤을 찾았다. 이 무덤의 묘주는 숙부인광주김씨(淑夫人光州金氏之墓)로 생졸연대는 강희(康熙) 15년(숙종 2년, 1676)에 태어나서 건륭(乾隆 8년(영조 19년, 1743)에 사망했다. 광주 김씨 무덤의 비석과 동자석의 재질로 보아 돈두악의 조면암으로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다고 확증할 수 있었다. 이 사실로 미루어 돈두악은 광주 김씨의 사망 시기를 전후한 18세기 때에 이미 비석이나 동자석을 만들어 세우고 있었다.

 

▲ 걸세오름 조면암으로 만든 동자석.

그러나 비석을 조면암으로만 세운 것은 아니었다. 한라산 남쪽과 서쪽에 위치한 비석 산지인 산방산, 걸쇠오름, 돈두악과 거리가 먼 지역인 김녕, 동복, 행원, 송당 등지는 한라산 북동쪽에 해당한다. 그곳에서는 간혹 기공이 적은 면을 활용한 현무암이나 붉은빛의 송이로 만든 비석이 드물게 보인다. 과거 조면암 비석 산지와 멀고 교통이 매우 나빴던 관계로 조면암 산지에서 비석을 공급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마을 주변의 현무암 중 기공이 자잘한 돌을 골라 면을 다듬어서 비석으로 만들었다.


조면암은 면이 고운 대신 풍화에 약하여 비문이 빨리 훼손되거나 쉽게 부서지며 아예 부러지는 경우도 있다. 대석(臺石)으로는 직사각형(方趺)과 거북이 모양(龜趺)이 있다. 대석은 주로 현무암이 많이 사용되고, 그 외에 송이석과 조면암을 사용하지만 조면암 대석은 귀한 편이다. 거북이 형상의 좌대(龜趺)는 주로 용암 쇄설물이 많이 사용되는데 송이석은 현무암에 비해 형상을 새기기가 편리한 때문이다. 현무암은 세부 묘사가 무척 어려운 까닭에 피하고 있으나 아쉬운 대로 촘촘한 것을 골라 쓰고 있다. 조면암은 생산지가 제한되어 있어서 석재가 귀하여 받침대로는 잘 사용하지 않고 주로 비석의 몸체로 사용한다.


백나용 기자 nayong@jejunews.com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