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시위의 어두운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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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한성. 재 뉴질랜드 언론인

요즘 한국처럼 시위와 집회가 자주 열리는 나라도 흔치 않을 것이다. 추운 겨울철인데도 촛불 집회와 태극기 집회는 주말마다 되풀이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놓고 찬성과 반대파 사이에 세력 대결 양상으로 펼쳐지고 있다. 마치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숫자로 탄핵 문제가 판가름난다는 듯한 분위기다.

일반 시민들은 물론 대권을 꿈꾸는 정치인들과 박 대통령의 법률 대리인단 변호사까지 집회에 참석한다는 소식이고 보면 정상은 아닌 것 같다. 그야말로 정치와 재판까지 길거리에서 하겠다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일차적으로는 한국 사회의 시스템이 문제 해결 능력이나 신뢰가 부족한 데 원인이 있겠지만 배경에는 한국인 특유의 집단주의도 작용하고 있다.

한국의 집단주의는 개인주의는 나쁜 것이라는 전제를 바탕에 깔고 있을 만큼 뿌리가 깊다. 많은 사람이 피부로 느끼며 살아간다. 가령 어떤 사람에 대해 개인플레이를 한다고 얘기했을 때 좋은 뜻이 아니라는 것쯤은 누구나 다 안다. 독불장군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한국인들의 집단주의는 나를 앞세우지 않는 언어 사용에서도 나타난다. 내 가족이 아니라 우리 가족, 내 학교가 아니라 우리 학교라고 말하는 게 모두 집단주의 사고의 징표들이다.

집단주의는 가족이나 친구, 조직에 대한 연대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어려운 처지에 빠진 가족이나 친구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걸 은연중에 나누어 갖는다. 개인의 위험이 집단의 책임으로 어느 정도 분산돼 나타날 수 있는 구조다. 좋은 측면이다.

하지만 개인을 집단의 한 구성원으로 보려는 경향이 강하다 보니 개인의 욕구는 억제되거나 뒤틀려 나타나기 일쑤다.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역할과 의무가 지나치게 강조되기도 한다. 개별적이고 대등한 존재로서 건강한 인간관계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집단주의의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음식점에 여러 명이 들어가 주문할 때도 곧잘 드러난다. 모든 사람이 된장찌개를 시키는 데 혼자 생선 매운탕을 시켰다간 눈총을 받기 십상이다. 집단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는 데 소극적이거나 튀는 행동을 자제하는 이유다.

집단주의의 또 다른 문제는 다수의 힘으로 몰아붙이면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다는 환상이다. 이런 사고방식이 무서운 건 합법적이냐, 윤리적이냐 하는 것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 단계까지 치달을 수 있다는 점이다. 사리판단 능력을 잃어버리고 맹목적으로 될 소지가 커진다.

물론 집단주의 문화가 한국만 있는 건 아니다. 한국보다 더 극단적인 형태도 많다. 가족이나 부족, 공동체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조직 내 구성원을 살해하는 명예살인이 아직도 어떤 지역에서는 버젓이 행해지고 있다. 또 집단주의의 광기가 전체주의로 치달았던 시기도 있었다. 집단주의가 사회적 병리 현상으로 변질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집단주의는 생명을 위협받는 자연환경에서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 취한 가장 효율적인 선택이었다. 자위능력을 갖춘 일부 맹수들을 제외하면 동물들도 대개 그런 식으로 생존을 도모한다. 하지만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하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집단주의도 한 단계 성숙해야 한다.

사회에서 목소리를 앞세운 다수가 제도의 흐름을 특정한 방향으로 끌고 가겠다는 건 위험한 발상이다. 아무리 평화시위의 깃발을 높이 쳐든다고 해도 민주주의의 목을 조르는 족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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