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리아득(他利我得)
타리아득(他利我得)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정복언. 전 중등교장/시인

바다는 넓은 마음으로 세상을 품고 있었다. 진즉 나의 상처를 보듬으려 한결같이 기다려왔음을 고백할 때 눈가가 붉어졌다. 세월이 흘러서야 화해의 문을 여는 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나는 1983년 여름 한 교직 모임의 해변 야유회에 참석했었다. 낚싯줄을 바다에 드리우고 릴낚싯대를 바위틈에 고정한 후, 한참 수영을 즐기다 뭍으로 올라올 때였다. 한 회원이 나의 낚싯줄을 들쳐 올리며 납봉돌로 나의 왼쪽 눈을 때려버렸다. 순간의 사고는 내게 영원한 운명의 아픔이었다.

바다의 잘못은 아니었으나, 나는 그를 원망하며 마음의 문을 닫아 버렸다. 바다와 몸을 섞던 소년 시절이 옛사랑처럼 나타나다 사라지곤 했다. 수영을 즐기다 커다란 파도가 밀려오면 잠수하여 돌덩이나 바위를 붙잡고 지나가기를 기다리던 시간도, 물안경을 쓰고 어랭이, 우럭 또는 운이 좋으면 붉바리도 한두 마리 낚던 시간도 망각 속에 가두어 놓았다.

추억은 그리움으로 되살아나는 슬픔인가.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그리워졌다. 나는 올해 (사)제주바다사랑실천협의회에 가입했다. 어제는 두 번째 바닷가 정화 활동을 했다. 30여 명 회원들이 표선면 해안동 일대에서 열심히 쓰레기를 주웠다.

바다는 출렁이는 언어로 내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역사는 지우는 것이 아니라 읽고 해석하는 것이라 했다. 보다 나은 역사를 쓰기 위해 선행이든 악행이든 보존하면서 제대로 교훈을 얻으라 했다. 예술의 목적은 인간의 영혼을 아름답게 승화시키는 데 있다며, 표현의 자유를 빌려 발가벗긴 몸통으로 돌을 던지는 세태를 바꾸라 했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자유를 준 것이, 죄를 지으라고 허락하신 것이 아님을 알지 않느냐고 큰 소리로 말해 주었다.

햇살은 따사로웠고 바다는 고른 숨을 쉬었다. 수십 마리의 물새들이 열심히 먹이를 찾고 있었다. 한 회원이 카메라에 그 모습을 담으며 다가서자 그들은 자리를 옮겼다. 그 회원은 나에게 말했다. “고기들의 박수 소리를 들으셨습니까? 살려줘 고맙다는.”

버스로 귀가하면서 좋은 글 낭송에 귀를 세우기도 하고, 입심 좋은 회원이 들려주는 아랫동네의 구멍가게 불난 이야기에 까르르 웃음을 쏟아 내는 60, 70대의 사람들, 정녕 그들은 하릴없어 함께한 것은 아니다. 나는 이창범의 시 ‘나눔의 손’ 일부로 그들을 묘사하고 싶다. ‘온 누리 다 밝히면 좋으련만/그럴 수 없어/한구석이라도 밝히고자/빛을 던지는 사람’.

나의 뇌리에는 좀 전에 보았던 ‘타리아득’이란 글자가 살아서 움직였다. 한 기업의 천연물연구소 건물 앞 벽면에 당당하게 들어선 말, ‘남에게 이로워야 나에게 득이 된다’.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게 기업이지만, 기업가의 맑은 정신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벌써 잠룡들의 키 재기 소리가 요란하다. 눈 비비고 봐도 그 나물에 그 밥이다. 표를 먹고 사는 사람들은 태생적으로 ‘너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며,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경쟁의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그래서일까, 그들에게서 공존의 방식을 보았던가. 반목과 대립으로 전면전을 일삼는 싸움꾼들을 정치인이라 부를 수 있을까.

올해에는 진정한 정치인을 고대한다. 낮은 마음으로 봉사하는, 부족함을 고백하며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마음이 넓고 인간성이 돋보이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쓰러진 풀잎들을 일으키는 봄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면 좀 어떤가. 어두운 밤 찬란한 별과 같은 사람, 뙤약볕 속의 시원한 샘물 같은 사람이면 또 어떤가.

다음 달 봉사 활동을 기다린다. 나는 바다의 소리를 들으며 인간적인 사람에서 인간인 사람으로 성숙하고 싶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