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시 아라동의 고한조 무덤. 고한조는 영조 38년(1762년)에 태어나 정조 13년(1789년) 무과에 급제해 정의현감과 대정현감 등을 거쳤다.

사람이 죽으면 남는 것은 이름뿐이다. 현실 세계의 부와 지위는 현실에서만 통용될 뿐 사후세계에 갈 때는 누구나 똑같다. 빈 몸으로 왔다가 빈 몸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사람들은 인생무상이라는 말을 자주한다. 삶이 지나갈수록 생의 시간은 소모되고 죽음의 시간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죽음을 더 생각하게 되고 그만큼 인생의 모래시계가 빠르게 느껴진다.


사람이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 자기 인생만큼의 무게에 해당하는 이름말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름이 영광으로 남고, 어떤 사람에게는 치욕으로 남을 수도 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그저 세상에 한번 왔다 간 무명의 먼지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이 땅에 남기고자 기념물들을 만드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가장 무서운 공포는 잊히는 것, 즉 기억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가까운 사람에게 잊히는 것이야말로 가장 두려운 일이 아닌가. 그래서 ‘잊힌 사람이 가장 슬픈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필자는 무덤을 생각하면서 인간은 결국 ‘호모 모뉴멘탈리쿠스’ 즉 ‘기념비적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우리 주변에 보면 온통 기념적인 일들로 넘치고 있고 그것을 기념하는 일이 일상이 되고 있다. 생일, 결혼, 만남, 승리, 축복, 당선, 표창, 입학, 개업, 입주 등 생로병사 전 삶의 과정에 기념비성으로 가득 찼다. 의미를 기념하고자 하는 행위가 바로 누군가로부터, 잊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이 아닌가. 


▲고한조(高漢祚)와 전주 이씨 무덤
아라동의 한 언덕에 고한조와 전주 이씨 합묘가 있다. 합묘란 한 무덤에 부부가 함께 묻힌 것을 말한다. 이 무덤은 가선대부 원주중군 고공 정부인 전주이씨 지묘(嘉善大夫 原州中軍 高公 貞夫人 全州李氏之墓)이다.


고한조 무덤은 한라산에서 삼의양악의 맥을 이어 혈처를 마련했으나 시대가 흐르면서 도로 개발로 인해 좌청룡이 무자비하게 잘리고 안산의 방향에 큰 도로가 지나가면서 혈맥의 기운이 쇠했다. 이 무덤은 2013년까지만 해도 자손들이 벌초하던 무덤이었는데 2014년이 되면서 벌초하는 자손마저 끊긴 듯 잡풀만 앙상하게 자랐다. 제주의 명문 토호 집안의 하나인 제주 고씨 집안은 많은 인재를 배출해 오늘날까지도 번성하고 있다.


비석에 의하면 고한조(高漢祚)와 전주 이씨 무덤은 원래 인근 아라리에 장례를 지냈다가(初葬) 갑오년(甲午年·1834)에 현재의 자리(仁多羅)로 이장하면서 부인과 합장됐다. 비석은 崇禎後五 乙未 四月 日(1955년)에 세운 것이다.


고한조(高漢祚)는 영조 38년(1762)에 태어나 정조 13년(1789) 기유년(己酉年)에 무과에 올랐다. 고취선(高就善)의 아들로 아버지는 소문난 부자였다. 고한조의 벼슬은 훈련원(訓練院) 첨정(僉正)을 거쳐 정의?대정 현감, 강화부 중군, 강원도 감영의 중군을 지냈다. 고한조는 정조 17년(1793) 7월 허식(許湜)의 후임으로 정의 현감에 임명되었다가 같은 해 12월에 사간원의 상소로 파직되었다. 1794년 유명한 갑인년 대흉년에 고한조는 쌀 300석을 스스로 사 국가에 헌납하니 그의 의로운 뜻을 인정하여 1795년 대정현감으로 다시 제수됐다. 이미 고한조는 명월만호 시 쌀 500석을 바친 적이 있었다. 또 대정현감 재직 시 고한조는 대정현성 안에 서당을 설립하고 달마다 쓸 경비(?料)를 마련하여 유학제생(幼學諸生)들에게 학문을 권장하였다. 이 서당은 후에 대정현감 부종인에 의해 열락재(悅樂齋)라는 이름을 얻었다. 같은 해에 대정현성 동문에 동문루(東門樓)를 중수하였다. 1797년 6월, 대정현 해안에 류큐인(流球人) 7명이 표도하자 선박을 수리해 주고 수로(水路)로 송환하였다. 고한조의 아들 창빈(昌彬)과 손자 성규(性奎)도 무과에 급제하여 대정현감을 지냈다.


▲산담의 석물
고한조 산담은 전형적인 조선 후기 등변사다리꼴 양식의 비례를 보여주고 있다. 산담은 앞면 길이가 12.7m, 뒷면 길이가 10.9m, 좌·우측 산담 길이는 18.2m이며, 산담의 넓이는 1.6~1.7m이고 높이가 80cm 정도 된다. 망자가 보는 방향에서 신문(神門)은 좌측에 나 있고 정돌은 그 위에 두 개 걸쳐 있다.


무덤의 석물은 망주석, 동자석, 비석, 상석, 혼유석, 토신단 등이 있다. 망주석은 위에 연꽃 모양에 팔각형이고 무덤 앞쪽 좌우에 세워져 있다. 제주의 망주석은 무덤을 표시하는 석물인데 육지의 망주석에 새겨진 세호(細虎)가 없다. 이는 육지 문화에 대한 정보의 부재이기도 하거니와 망주석의 정확한 형태가 그림으로 그려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설령 도상이 있어도 현무암 재료라는 한계 때문에 작고 세밀한 모양을 새길 수 없는 이유도 있다. 하지만 제주 지역의 망주석은 종 모양이 많고 세호를 새긴 망주석을 찾아보기 힘들다.

 

   
▲ 제주에서 유일하게 문양팔괘도가 새겨진 고한조의 거북등 비석.

동자석은 지절(제절) 아래에 좌우 서로 마주 보고 서 있다. 이 동자석은 각주 형태로 정갈한 느낌이 들도록 잘 만들어졌다. 크고 동그란 눈에 쌍꺼풀이 있고, 전체 얼굴 형태가 부드럽게 다듬어졌다. 손은 양각 표현으로 가슴 앞에서 모으고 있으며 명료하게 새겨져 홀을 꼭 잡고 있다. 얼굴과 몸체 사이의 목이 좁아지면서 긴장감을 주면서도 여성적인 느낌이 묻어난다. 머리는 댕기 머리로 도드라지게 새겼다. 동자석의 크기는 길이 66cm, 넓이 25cm, 두께 19cm이다. 석질은 조면암이다.  

  
비석은 둥근 원수귀부형(圓首龜趺形)으로 비신에 총알 세례를 받은 흔적이 있으며 대석은 거북이 형상(龜趺)인데 붉은 속돌로 만든 거북등에 문왕팔괘도가 새겨져 있다.


전해오는 팔괘에는 복희팔괘와 문왕팔괘가 있다. 복희팔괘도는 복희씨가 만든 것이고, 문왕팔괘도는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 주나라 문왕이 만든 것이라고 전한다. 고한조의 거북등에는 문왕팔괘라고 하는 후천팔괘가 새겨져 있다. 복희씨 팔괘가 하도(河圖)를 본받아 삼재(三才:하늘, 사람, 땅)의 도(道)로 팔괘를 그린 것이 자연 운행의 원리에 맞으므로 선천팔괘라고 한다. 후천팔괘는 복희씨 팔괘를 이어 받아 천명(天命)과 천시(天時)를 같이 따르는 것이다. 이 선?후천 팔괘를 하도낙서(河圖洛書)라고 하는 것은 하수(河水)에서 용마가 지고 나온 것이 하도(河圖)이고, 낙수(洛水)에서 거북이가 지고 나온 것이 낙서(洛書)라고 하기 때문이다. 하도는 하늘이고 낙서는 땅이어서 십이지지가 나온다. 이 두 팔괘가 서로 어울려서 우주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