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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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실/수필가

컹, 컹, 컹, 자각몽처럼 짖어대는 소리에 눈을 떴다. 다급하게 내려가 보니 혜윰의 몸에서 소주 냄새가 진동했다. 시멘트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 종이컵과 소주병, 담배꽁초와 돌멩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혜윰이 젖은 몸을 부르르 떨자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비틀거리는 중년 남자의 고함 소리가 이른 새벽을 깨운다.


‘밤새 혼 술을 마신 저 남자. 혜윰이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술을 권하느라 돌을 던지고 병술을 퍼부은 것인가.’ 꼬리를 살랑대며 반기는 혜윰을 맨손으로 쓰다듬다 소리 없는 짐승의 울음을 생각해 본다.

 

겨울과 봄이 교차 되던 지난 2월. 지인이 진돗개 혈통의 강아지 한 마리를 보내 왔다. 숫기가 없어 보이는 희끄무레한 연갈색 수놈이었다. 꽃샘추위가 유난하여 우선 볕 잘 드는 창고 안에 녀석의 보금자리를 마련했지만 사료엔 입도 대지 않는다. 우유를 데워다 앞에 놓으니 그릇 바닥까지 쪽쪽 핥다 나를 쳐다본다. 녀석의 눈동자에 내가 앉아있다. 어미 품이 그리운 건가. 내 눈동자 속에서 자신의 눈부처를 보고 있음인가. 강아지의 눈에서 왠지 모를 서러움이 내 가슴으로 번져 온다.


‘그래, 네 아무리 말 못하는 짐승이지만 어미와의 이별이 어찌 아프지 않겠니.’


생각에 잠겨 슬픔을 삭이는지 낑낑거리지도 않는다. 어미 품에서 잘 자라던 녀석인데.  불현듯 혜윰(생각)이라는 우리말이 떠올랐다.


“오늘부터 혜윰이야, 떠나온 엄마 얼굴 오래 잊지 말고 생각하는 개로 잘 자라렴.”


개나리와 목련이 꽃망울을 터뜨리더니 벚꽃이 흐드러졌다. 천지는 뭇 생명의 탄생 소리로 부산스럽다. 먹이를 거부하던 혜윰이도 하루가 다르게 커간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아지며 혜윰의 집을 창고 밖으로 옮기고 목줄을 길게 매였다.


따사로운 햇볕 아래 온종일 길 건너 감나무를 쳐다보며 혜윰이의 하루가 저물어 갔다.


감나무에 새순이 돋고 가지마다 다닥다닥 하얀 꽃이 피고 지더니 풋감이 주렁주렁 달렸다.


혜윰이의 간절한 눈빛을 먹고 감이 노랗게 익어 가리라.


온종일 목을 빼 들고 기다리는 녀석 때문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늘 다급해진다.


멀리서부터 차가 보이기 시작 하면 꼬리를 흔들며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두 발을 번쩍 들고 반긴다. 땅바닥에 얼굴을 바짝 대고 눈망울을 굴리며 속삭인다. ‘어디 갔다 이제 왔느냐고.’ 늘 미안해지는 순간이다.


여름의 무덥고 습한 기억을 뒤로하고 고슬고슬한 가을 햇살이 내려앉았다. 풀벌레 소리마저 애잔한 쇠락衰落의 계절이다. 털갈이를 끝낸 혜윰이는 두 귀가 쫑긋 서고 황갈색 꼬리를 말아 올려 의젓한 모습으로 자랐다. 긴 하루를 혼자서 이겨낸 혜윰이의 사유思惟도 깊어졌으리라.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연으로 생겨나고 인연으로 소멸한다더니 인연은 나 스스로 만드는 것인가 보다. 남편은 황갈색 개를 보며 어린 날 고향 집에서 기르던 황구가 돌아왔다고 귀에 입이 걸렸다. 가로등도 없던 어린 시절, 캄캄한 밤에 이웃 마을까지 제사떡을 함께 돌리던 황구가 쥐약을 먹고 죽어 버리자 몇 날을 울었다는 남편. 몇 십 년 만의 인연인 듯 혜윰이의 간식을 챙긴다. “우리 셋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자.” 저녁 산책을 함께 나서는 혜윰이는 분명 오래 된 우리 가족이다.


 
새벽 공기 찬데 형체를 알 수 없는 새 한 마리 빈 하늘을 가르며 날아간다.


지난 밤 공포의 순간을 토정吐情도 못하고 눈망울만 껌뻑이는 녀석. 얼굴에 고단함이 가득하다. 고개를 드니 가지 꺾인 감나무가 파르르 떤다. 도처에 뭇 숨 탄 것들의 소리 없는 고통이 귓가를 맴돌며 혜윰이의 지난밤 기억들도 스멀스멀 고개를 쳐든다.


혜윰. 작명作名의 낭패다.  어서 빨리 아픈 생각이 지워졌으면….


마음까지 축축하게 젖은 지상의 혜윰이들에게 우주 안 이웃들이 좀 더 우호적이길 간절히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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