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의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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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창. 신학박사/서초교회 목사

어린 시절에 함덕에서 살았는데 우리 집은 큰길 가에서 가게를 했다. 어머니는 가게 주인, 누나와 나, 동생은 점원들이었다.

한 달에 서너 번쯤 오일 장터에 가설극장이 세워졌는데, 1960년대 중반쯤에는 함덕 일구의 신흥리 가까운 쪽에 콘크리트 극장 건물이 세워졌다. 입구에서 표 받는 아저씨를 ‘기도’라 불렀는데, 아이들이 보기에 그는 대단한 권력자였다. 기도와 친하면 가끔 공짜로 극장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나의 두 살 아래 동생은 자주 영화를 보러 갔다. 극장표를 사거나 돈을 내는 거 같지는 않았는데, 극장 입구에서 기도에게 뭐라고 말하면 기도는 동생을 극장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참 부럽고 기가 막히기도 했는데…. 거기에는 이런 사연이 있었다. 극장에서 표를 받는 기도 아저씨는 우리 가게에 외상값이 많았다. 동생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주 자발적으로 외상값을 받으러 갔다. 외상값 독촉을 받은 기도는 채무를 연기하면서 동생에게 공짜 영화를 보게 했다. 한참 후에야 동생은 그 사실을 나에게 알려주었다. 그리고나서 다음에 외상값을 받으러 갈 때는 나도 함께 갈 수 있었다. 어린 시절에 극장 가까이 살아서인지, 지금도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다.

한 열흘 전에 이란에서 만든 영화를 보았는데, 어린이들을 주인공으로 하면서 전쟁의 비극을 잘 보여주는 영화였다. 첫 장면에 예쁜 여자아이가 절벽에서 떨어지려는 장면이 나왔다. 도대체 어떤 영화인지, 궁금한 마음으로 영화를 지켜보았다.

중동지방의 민족 간 갈등과 전쟁이 얼마나 심각한지 잘 보여주었다. 처음에 등장한 아이는 전쟁 중에 성폭행을 당한 아이였다. 어린아이인데 아기를 임신해 아기를 낳아야 했고, 그렇게 태어난 아기는 앞을 못 봤다. 그 아기를 등에 업은 어린 엄마는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어린 엄마는 아기와 함께 일찍 삶을 포기하려 했다. 그래서 첫 장면에 여자아이가 절벽에서 떨어지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여자아이의 오빠는 어떻게든 그 아기를 살리려 애를 썼다. 오빠와 여동생, 그리고 앞을 못 보는 아기 그렇게 셋이서 살아간다. 그 아기를 등에 업고 인생을 포기하려 절벽 끝에 선 어린 엄마의 모습이 잘 잊히지 않는다.

미국은 이슬람 세계에 강경한 입장을 보이려고 한다. 주로 테러리스트를 의식하면서 이슬람 세계를 바라보기 때문일 것이다. 대다수의 미국인들이 그 강경책에 가시적 또는 암묵적 동의를 표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에 중동의 어느 이슬람 국가는 미국과 함께 IS와 싸운 적이 있다. 이슬람 국가의 어느 절벽 근처에는 아기를 업은 어린 엄마들이 무언가를 망설이며 서성거리고 있다. 어느 바닷가에 시신으로 떠오른 아기도 있었다.

다수 국민의 뜻에 따라 국가 정책을 세우고 집행해가는 것이 그들의 당연한 권리이다. 하지만 미래에도 인정받을 수 있는 권리여야만 진정한 권리가 된다. 우리의 시대에도 전 세계를 향한 경찰국가가 있다면 그래도 미국이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들도 이제는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인가?

‘영화 속의 아이들’ 중 어떤 아이는 이슬람의 보통 사람이 됐고, 또 몇 사람은 테러리스트가 됐을 것이다. 내 동생처럼, 석유 외상값을 받으러 갔다가 미국에 머물러 사는 아이도 있을 듯하다. 우리는 모두가 극장 근처에 살던 “영화 속의 아이들”이었는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강경한 정책을 대하면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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