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창훈 作 한담갯갓길.

한겨울 망망대해 폭우와 마주한

출렁이던 시간 닻줄마저 놓아둔 채

장한철 산책로에서 표류기를 띄운다

 

닿을 듯 닿지 못해 더 깊어진 섬

휘청이는 급물살에 아직 저리 흔들리고

순비기 야윈 등마저 덩그러니 누운 날

 

그 많던 발자국은 다 어디로 갔을까

해풍 맞은 수선 향기 아직 그대로인데

바람에 흔들리던 초가 수평선을 넘고 있다

 

-장영춘의 ‘애월, 장한철 산책로에서’ 전문

 

1770년 12월 25일, 제주바당에 큰 풍선(風船)이 떴다. 그 배는 오늘날 여객선의 기능까지 하는 돛배였고, 제주와 강진의 남당포(지금의 남포마을)를 잇는 뱃길에 있었다. 거기엔 서울로 과거시험 보러 가던 장한철을 포함한 스물아홉 명이 타고 있었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다고 한다. 하지만, 한 번 해보자. 이 배가 예정대로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확실한 것은 ‘장한철 표해록’은 없었을 것이다. 배가 거센 풍랑을 만나 표류하였고, 이리저리 떠돌다 우여곡절 끝에 청산도에 표착하기까지 22일 간의 발자취는 그야말로 생과 사를 넘나드는 각본 없는 드라마였다. 그 풍랑, 그 기적 같은 생환이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최부의 ‘표해록’, 그리고 옌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 비견될 정도의 해양문학 최고봉인 이 표해록을 낳은 것이다.

 

그야말로 이 표해록엔 조선선비 장한철의 기개와 문장가로서의 혼, 그리고 끝내 돌아오지 못한 스물한 명의 혼도 깃들어 있는 것이다.

 

241년이 흘러 그의 고향 애월읍 한담공원에 ‘장한철 선생 표해 기적비’가 세워졌다. 그의 후손들과 애월문학회(당시 회장 김종호), 그리고 지역주민들의 뜻이 모아진 것이다. 이 기념비는 길이 8m의 받침대에 높이 6.2m 폭 1.8m 규모의 화강암이 우뚝 솟아 청운의 꿈을 안고 넓은 바다로 나아가는 돛단배를 형상화한 것이다.

 

‘바람 난장’은 겨울 끝물 어느 날, 그 앞에서 펼쳐졌다.

 

위 시는 장한철 선생의 후손인 장영춘 시인의 작품으로서, 시 낭송가 윤행순씨가 낭송했다. ‘출렁이던 시간 닻줄마저 놓아둔 채/ 장한철 산책로에서 표류기를 띄운다’는 첫째수의 비장한 어조가 목적지에 닿을 듯 닿지 못해 바람 따라 표류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셋째 수에선 산책로의 그 많던 발자국이 사라져가듯 부서진 배와 함께 사라져 간 그때 그 일행들에 대한 아쉬움을 그려낸다. 이 시는 2014년 계간문예 ‘다층’이 기획한 올해의 좋은 시조 ‘베스트 10’에 선정된 바 있다.

 

제주바닷가는 어딜 가나 저마다의 비경을 품고 있다. 그중에서도 장한철 산책로는, 마치 동짓달 기나긴 밤의 한 허리를 베어낸 것 같은 기다림과 그리움의 길이다.

 

   
▲ 열 번째 바람난장이 제주시 애월읍 애월리에 위치한 장한철 산책로에서 진행됐다.사진은 바람난장 가족들.

김종호 시인의 안내로 한담에서 곽지해수욕장까지 1.2km의 그 산책로를 따라나섰다.

 

코발트빛 바다와 검붉은 갯바위가 어우러져 빚어내는 장관도 장관이지만, ‘매바위’, ‘필봉석’, ‘모자석(母子石)’ 등 갖가지 형상의 바위가 마치 먼 바다에서 돌아올 돛배를 기다리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어진다.

 

   
▲ 윤행순씨의 시 낭송 모습.

청산도 하면 장한철 선생 생각이 난다. 다랑쉬오름에 올라 청산도를 봤을 때에도, 직접 내 발길이 청산도에 닿았을 때에도 그랬다. 아쉬운 점은, 장한철이 청산도에 도착했을 때 그 지명을 기록해 두었더라면 더 사실적이고 친근한 역사의 섬이 되었을 것이다.

 

이번 난장에는 문인과 화가, 음악인 등 20여 명의 예술인과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어우러져 서로의 끼를 한껏 펼치는 무대가 되었다.

 

글=오승철

그림·사진=유창훈

시 낭송=윤행순

음악·공연감독=이상철

 

※다음 바람난장은 한라산 백록담에서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