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탐라개국 시조 위패 모신 삼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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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성역화사업...직계 후손들 춘추대제 봉행
▲ 탐라국을 개국한 삼신인(삼을나)의 위패가 봉안된 삼성혈 내 삼성전 전경.

태초에 탐라에는 사람이 없었다. 옛 기록(동문선·고려사·영주지)에 따르면 한라산 북쪽 기슭에 있는 모흥(毛興)이라는 곳에서 삼신인(三神人)이 땅에서 솟아났다.

고을나(高乙那), 양을나(良乙那 후에 梁乙那), 부을나(夫乙那) 삼신인은 수렵생활을 하다 오곡의 씨와 송아지·망아지를 가지고 온 벽랑국 세 공주를 맞이해 농경생활을 하며 정착을 했다. 드디어 탐라국이 개국하게 됐다.

국가지정 문화재 사적 134호인 삼성혈(三姓穴)은 이름처럼 세 신인이 ‘品’ 모양의 구멍(穴)에서 출현한 곳이다.

전설로 내려오던 개국신화는 1526년(중종 21) 이수동 제주목사가 돌담을 쌓고, 붉은 칠을 한 홍문(紅門)과 혈비(穴碑)를 세우면서 성역화사업이 이뤄졌다.

1698년(숙종 24) 유한명 목사는 탐라시조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혈의 동쪽에 성전인 삼성전(三姓殿)을 건립했다.

1785년 정조는 삼성사(三姓祠)라는 편액을 하사하며, 제례를 봉향하도록 예관으로 홍문관 교리(校理·종5품) 고택겸을 보냈다.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삼성전은 허물어졌다. 봉안됐던 삼을나 위패는 오라리 고행간, 거로리(화북2동) 양성연, 영평리 부인행이 각각 시조 위패를 모시고 갔다.

1910년 삼성전은 다시 건립됐고, 고종의 다섯 번째 아들인 의친왕이 친필 사액을 내렸다.

지금의 건물은 1971년 낡은 성전을 완전히 해체해 다시 중건한 것이다. 전면 6칸, 측면 4칸의 집으로 구성됐다. 건물의 너비는 12m, 폭은 5.5m로 지붕은 팔작형이다.

 

▲ 삼신인이 땅 속에서 나오면서 탄생설화의 성소가 된 삼성혈 내 모흥혈 모습. 이곳의 구멍은 ‘品’ 모양을 하고 있다.

삼성전에서는 매년 봄(4월 10일)과 가을(10월 10일)에 삼성 직계 후손들이 제사(춘추대제)를 봉행하고 있다.

삼국(고구려·백제·신라)의 건국신화는 알에서 태어난 북방계의 난생설화를 근거로 하지만 탐라의 건국신화는 땅에서 솟아난 남자와 바다에서 건너온 여자가 결합한 남방계 신화를 보여주고 있다.

삼신인의 등장은 권력을 가진 세력(부족장)의 등장을 의미한다. 벽랑국의 세 공주는 농경문화를 가진 외부세력의 등장을 알리고 있으며, 외부세력과의 결합을 통해 탐라국이 형성됐음을 개국신화에서 보여주고 있다.

역사시대에 이르러 왕자와 성주가 다스렸던 탐라왕국은 한반도와 중국, 일본 류큐왕국(오키나와)과 해상교역을 하며 수천 년간 독립왕국을 유지하다가 중앙집권화가 이뤄진 고려에 복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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