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속 반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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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란

이곳 송당 주민들은 우리 마을을 취락구조라고 부른다. 생경한 어감으로 이방인 취급을 받는 듯해 마음도 상했지만 골목 안에 담겨있는 일상들은 여유롭고 따뜻하다.

빈집이 더 많았던 골목에 진정한 주인들 입주가 시작해 끝난 기간은 불과 석 달이 안되는 짧은 시간이었다. 작은 골목 사이에 조성된 열두집터는 십오 년 전쯤 젊은 부부들을 위한 터전이었는데 그 당시만 해도 지금과는 판이했을 제주 산간마을 입지조건이었을 것이다.

인구감소로 인한 초등학교의 타교 흡수를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을터.

하지만 지역 특성상 직장 부재로 젊은 부부는 정착할 수 없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제 몫을 했던 베이비붐 세대의 가장이었던 우리 남편들은 타의든 자의든 현역에서 나와야 했으니 결과적으론 관에서 베푼 몇 안 되는 제도 혜택의 수혜자가 된 셈이다.

복잡하고 빠르게 변하는 서울에선 막연한 노후의 두려움에 갇혀 열심히 살았던 젊은 날들조차 평가절하하기에 여념 없었다.

그런데 제주 살이 육 년 차에 이만한 정착으로 나눔의 극대화를 누리고 있으니 얼마나 축복인가?

서울과 제주란 시공간에 사무치는 손주들 그리움을 골목 손주들로 보상을 받았었으니 그 또한 축복이었다.

어느 한 집에 갑작스러운 손님이라도 올라치면 골목 한 바퀴만 돌아도 한상 그득하게 차려낼 수 있지만 골목 안에서만 넘치는 나눔이라면 나눔의 극대화란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육지 친인척과의 나눔도 일상화됐을 정도니 은퇴 후 나눔이 마치 저녁 노을을 닮았다.

어릴 적 명절날이면 우리 먹을 것도 모자랄 판에 이웃으로 퍼 나르던 엄마의 나눔에서 느꼈던 결핍감과는 상반된 풍요로운 나눔이다.

얼마 전 고구마를 구웠는데 어찌나 풍미가 제대로 나는지 그 맛에 아주 매료되고 말았다.

절대적 빈곤으로 각인되었던 유년의 결핍감은 절대적 미각으로 기억되곤 했는데 그 맛 중 하나가 군고구마의 맛이었다.

고구마 굽기에 성공했으나 서울서도 쓰지 않았던 알루미늄 호일이 큰 잔여물로 남았다. 대안이 없어 호일을 쓰긴 했으나? 생태적 삶을 실천하려는?노력에 만만치않은 저항이 불편함을 넘어선다.

“에이 군 고구마도 먹지 말까?”하는 내게 “고구마라도 계속 궈 먹읍시다.” 경어를 써가며 애써 불만을 숨기는 남편이지만 평소 먹는 것에 관한한 불만이 많음을 숨기지 않는다.

40년 긴 세월에도 음식문화에 관한 한 우린 아직도 제주 속 취락마을과 닮은 듯해 씁쓸했다.

대안으로 찾은 직화 냄비 덕으로 겨울밤 골목에 군고구마 냄새가 끊이지 않았으니 이것이 곧 온기 넘치는 마을 냄새였다.

바구니를 들고 나가 한가득 나물을 뜯어오니 3월 초록 향내가 물씬하다. 김이 물씬 솟는 갓 삶은 나물의 싱그런 봄내를 된장에 조물조물 무쳐서 나눠야겠다.

겨우내 초록 잎들로 둘러싸인 골목의 온갖 향내들이 어우러진?우리들 냄새이기를 소망한다.

청정함의 척도를 가늠하는 반디불이가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 일단 취락마을이란 공적 명칭을 ‘반디 마을’로 바꾸는 것으로 그들을 골목식구로 삼으련다.

행여나 송당 주민들과의 위화감이 염려스러워 아주 작은 이정표를 골목 입구에 심었다.

누구라도 웃을만한 소심함은 겸손으로 받아드려지기를. 그리고 우리가 속한 작은 골목에 빛의 향내까지 실어 적극적 제주 사랑하기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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