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아래 울려퍼진 맑은 음색에 청운도 잠에서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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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백록담(白鹿潭)
▲ 열한 번째 바람난장이 백록담에서 진행됐다. 사진은 이정순 제주국제오카리나협회 회장의 연주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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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정에 가까울수록 뻐꾹채 꽃 키가 점점 소모(消耗)된다. 한마루 오르면 허리가 스러지고 다시 한마루 위에서 모가지가 없고 나중에는 얼굴만 갸웃 내다본다. 화문(花紋)처럼 판(版) 박힌다. 바람이 차기가 함경도 끝과 맞서는 데서 뻐꾹채 키는 아주 없어지고도 팔월 한철엔 흩어진 성신(星辰)처럼 난만(爛漫)하다. 산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렇지 않아도 뻐꾹채 꽃밭에는 별들이 켜 든다. 제자리에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기서 기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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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도 쓸쓸하여 살지 않는 한모롱이, 도체비꽃이 낮에도 혼자 무서워 파랗게 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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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새끼를 낳노라고 암소가 몹시 혼이 났다. 얼결에 산길 백 리를 돌아 서귀포로 달아났다. 물도 마르기 전에 어미를 여윈 송아지는 움매 - 움매 - 울었다. 말을 보고도 등산객을 보고도 마구 매어달렸다. 우리 새끼들도 모색(毛色)이 다른 어미한테 맡길 것을 나는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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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도 기지 않는 백록담 푸른 물에 하늘이 돈다. 불구(不具)에 가깝도록 고단한 나의 다리를 돌아 소가 갔다. 쫓겨온 실구름 일말(一抹)에도 백록담은 흐리운다. 나의 얼굴에 한나절 포긴 백록담은 쓸쓸하다. 나는 깨다 졸다 기도(祈禱)조차 잊었더니라.

 

-정지용의 ‘백록담’ 일부

 

▲ 김해곤 作 고도(高道)에서 봄을 만나다.

1938년 8월 어느 날, 정지용 시인은 한라산 정상 백록담을 오른다. 조선일보사가 기획한 ‘남해기행’ 행사에 김영랑 시인과 함께 참석했다가 혼자 제주도를 찾은 것이다. ‘백록담’에는 식물들의 이름은 많지만, 어느 코스를 통해 등정했는지는 밝히고 있지 않다. 이에 대해 한라산 생태문화연구소의 강문규 소장은 ‘면암 최익현 선생이 그랬듯이, 아마 제주시에서 출발했다면 그때의 전통적인 등산로인 관음사 코스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한다.

 

‘바람난장’ 팀은 정지용 시인과 백록담을 함께 등정하는 심정으로 정상 등반이 가능한 성판악 코스로 출발했다. 계절은 겨울과 봄이 엎치락뒤치락 영역을 다투는 중간이어서 아이젠도 채웠다가 풀었다가를 반복해야 했다. 오로지 정상을 향해 땅만 보고 걸을 뿐, 주변을 둘러 볼 여유조차 없다. 그런데 정지용은 초행길, 그것도 이렇게 나무가 빽빽한 숲길을 헤쳐 걸으며 어떻게 만나는 동물이나 식물들에 말 걸기를 할 여유가 있었던 것일까. 얼추 헤아려보니, 이 시에 등장하는 식물은 뻐꾹채 꽃, 암고란, 도체비꽃(산수국), 풍란, 고비고사리, 취나물, 삿갓나물 등 무려 16종이나 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등반객들 중에는 ‘제주방언’은 한 마디도 안 들렸고, 육지에서 물 건너온 팔도사투리와 중국말만 들린다. ‘진달래밭 대피소’에서 컵라면으로 점심을 때우고, 뻐꾹채 꽃의 키가 아주 소모된다는 정상을 향했다.

 

▲ 백록담에서 바람난장이 진행된 가운데 장영춘 시인이 정지용 시인의 ‘백록담’을 낭송하고 있다.

‘향수’와 더불어 정지용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백록담’. 이 시가 ‘문장’지에 발표된 지 근 80년 만에 백록담에서 장영춘 시인에 의해 낭송됐다. 영혼이 있고, 정지용 시인 이 낭송을 들었다면 이렇게 명시를 허락한 백록담에 무한한 감사와 경의를 표했을 터이다. ‘바람난장’이 시작된 후 처음으로 오카리나도 연주됐다. 제주국제오카리나협회 이정순 회장도 기꺼이 동행한 것이다. 곡목은 남미 페루의 민요인 ‘엘 콘도 파사(EL CONDOR PASA)’, 즉 ‘철새는 날아가고’다, 마침 즉석 무대엔 등산객들이 자연스럽게 청중이 됐는데, 앙코르곡으로 빠르고 경쾌한 동요인 ‘물오리’가 연주되어 많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정순 회장은 오늘 대한민국의 가장 높은 무대에서 오카리나를 연주하는 행운을 얻게 돼 무척 기쁘다고 소회를 밝힌다. 이렇게 시와 음악, 그림과 사진예술이 어우러지는 동안, 구름에 가려졌던 백록담이 서쪽 능선에서부터 서서히 신비로운 자태를 드러낸다. 분화구에 남아 있던 물은 꽁꽁 얼어 있어, 마치 정지용 시인의 흰옷자락이 나부끼는 것 같았다.

 

바람난장은 이렇듯 발길이 가는 대로 간다. 서로 다른 장르의 예술인들이 끼를 한껏 펼치며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는 신명의 한 마당이다. 혹 독자들께서 그 지역에 소개하고 싶은 곳을 알려주시거나 청해 주신다면 기꺼이 찾아갈 것이다.

 

글=오승철

오카리나 연주=이정순

그림=김해곤

사진=장영춘

시 낭송=장영춘

음악·공연감독=이상철

 

※다음 바람난장은 제주시 애월읍 애월우체국 앞에 있는 ‘하물’에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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