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청동기 시대와 탐라시대-화산섬 제주는 돌 많아 매장시설도 돌 이용 고인돌 쌓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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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귀포시 대정읍 가파도의 지석묘. 제주지역의 지석묘는 대체로 해발 100m 미만의 해안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청동기 시대의 무덤


청동(靑銅)은 오늘날도 조각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데 브론즈라고 한다. 청동은 구리에 비소(砒素) 3%나 주석 10% 정도를 섞어서 만든다. 로뎅의 많은 조각 작품들이나 동전 같은 것들이 모두 청동으로 만든 것이다. 청동시대라는 말은 19세기 덴마크 출신 고고학자 크리스티안 톰센(Christian Thomsen)이 인류 역사를 부를 때 제시한 3단계 구분 체계(three age system)로 석기시대, 청동기 시대, 철기시대라고 명명한 데서 유래한다.  


순동을 이용해서 처음 도구를 만든 것은 B.C.5000경 근동 지역에서부터이나 청동을 이용하여 제품을 만든 것은 B.C.3000년경 이집트의 피라미드에서 출토되었다. 이후 청동기 제작 기술은 B.C.2000년경 유럽과 중국으로 파급되었다. 중국 동북 지역에서는 B.C.1000년경에 청동제 무기가 제작되었다. 우리나라 청동기의 시작은 합의된 설은 없으나 청동제 도구들이 나오는 B.C.1000년경으로, 본격적인 청동기 사용은 비파형 동검이 만들어진 B.C.600년경으로 볼 수 있다.


청동기 시대가 되면서 매장 시설을 갖춘 축조물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적석총, 지석묘, 석관묘, 옹관묘, 토광묘 등은 청동기 시대에 등장하여 초기 철기 시대까지 이어진다(국립문화재연구소·2001). 지석묘는 우리나라 청동기시대 대표적인 장묘제의 하나이다. 지석묘는 고인돌 또는 돌멘(Dolmen)이라고도 부르며, 세계적으로 다양하게 분포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되는 지석묘는 땅속이나 땅 위에 시신을 안치할 석곽(石槨)을 짜 만들고 그 위에 커다란 덮개돌인 상석(上石)을 올려놓은 돌로 된 묘지다. 지석묘는 유럽, 인도, 동남아, 중국, 일본 등 세계적으로 널리 분포되어 있으며, 그 국가들 가운데 우리나라에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다. 전라남도 지방인 경우 1만3000기라는 다량의 지석묘가 집중적으로 발견되어 최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돼 있다.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유물은 검이다. 청동검은 소위 무기라기보다는 제사장의 권위와 지배층의 권력을 상징하는 의례형 도구라고 할 수 있다. 청동기 전기에는 북방식 지석묘에서 발견되는 것이 비파형 동검이다. 중국 요령지방에서 많이 발견된다고 하여 요령식 동검이라고도 하는데 청동기 후기가 되면 한국식 세형동검으로 바뀌게 된다(유홍준·2010).


제주도에서 발견된 지석묘는 현재 200기가 넘지 못하며 애초에 그 수가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석묘는 대체로 해발 100m 미만의 해안 지역에 분포하며 제주시를 중심으로 서북부와 서남부에 주로 분포한다. 그리고 동남부는 드물게 분포하며, 동북부는 거의 확인되지 않았다. 한 구역에 5기 이상 분포된 지석묘군의 주요 유적으로는 제주시 용담동, 오라동, 외도동, 광령리, 서귀포시 대정읍 동일리 등이다. 제주도의 지석묘는 형식상 비탈면을 이용하여 매장시설 일부가 지하에 존재하는 반지상형(半地上型)이 많은 편이며, 외형상의 형태, 특히 지석의 고임상태와 매장시설의 위치 등을 기준으로 하면 제주도 지석묘는 지하형과 반지하형, 그리고 지상형으로 나눌 수 있다.


제주도 삼양 2동 삼화지구 유적 발굴지에서도 옹관묘가 출토되었는데 이 유구는 청동기 시대부터 초기 철기시대에 이르는 시기의 옹관묘 5기, 토광묘 4기, 장방형, 방형, 원형의 주거지 48기 등이 발견되었다. 특히 옹관묘는 원형 주거지 집단인 경우 주거지역과 분묘구역이 분리돼 있다. 제주도는 화산 용암으로 이루어진 섬이기 때문에 돌을 생활에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외도동 유적에선 생활과 관련된 석축(石築)들이 발견됐는데 이 축조물은 신석기 시대 문화층에서 초기 철기 시대에 이르는 시기의 돌 축조 시설들이다(국립제주박물관, 2009). 

 

▲ 비파형 동검의 날과 손잡이.

탐라국 시대의 무덤


탐라 시대를 논함에 있어서 고고학의 편년에서는 탐라성립기(B.C. 300~A.D.300)와 탐라 시대(A.D.300~A.D.900)로 상정한다. 다시 탐라성립기는 세분된다. 전기(B.C. 300~B.C. 100)에는 옹관묘와 지석묘가 축조되고, 중기(B.C.100~A.D.100)에 이르면 자연석과 깬 돌로 주거지에 석벽을 사용한 흔적이 나타나며, 사회적으로는 분업화가 진전되고 계층의 불평등화의 증거로 철기와 구슬, 동검(銅劍), 옥환(玉環), 동경(銅鏡), 오수전, 화천 등 위세품(威勢品)이 증가한다. 그리고 후기(A.D.100~A.D.300)에는 마을 내부에 석축시설이 축조되는데 마을의 경계뿐만 아니라 마을의 영역을 과시하는 의미와 함께 수장층(首長層)의 권위를 드러내는 용도가 되기도 했다(제주고고학연구소·2015).   


탐라 시대(A.D.300~A.D.900)는 다시 전기와 후기로 나뉜다. 탐라전기(A.D.300~A.D.600)에는 앞 시기에 유행했던 지석묘(고인돌)와 옹관묘가 지속해서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탐라후기(A.D.600~A.D.900)는 대체로 삼국시대에 해당하는데 탐라는 6세기경 백제와의 교류관계가 성립된다. 탐라후기의 유적으로는 곽지패총 4지구, 고내리 유적, 용담동 제사유적, 종달리패총 3지구 등이 있다(김경주·2009).  


탐라를 국가의 시작으로 추정하는 고고학적 자료는 제주시 용담동 철기부장(鐵器副葬) 적석묘역(積石墓域)의 목곽묘가 있다. 이 목곽묘는 대체로 탐라의 인구성장이 급격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곽지리식 토기의 등장과 같은 시점으로 기원 2세기대 전후로 추정하고 있다. 이 묘역은 1984년 제주시 용담동 월성마을에서 발견되었다. 이 묘역은 지금까지 알려졌던 지석묘와는 달리 적석으로 된 묘역 내에 석곽묘와 옹관묘로 구성된 복합묘유적(複合墓遺蹟)으로 조사되었다. 이곳에서 조사된 유구(遺構)는 석곽묘 4기, 단독 옹관묘 및 합구식(合口式) 옹관묘 6기이다. 이 유구 주변에는 철제 장검 2점, 단검 1점, 철모1점, 끌형 무기 2점, 도끼 5점을 포함한 다량의 철기와 유리구슬 목걸이 등이 부장되어 있었다.


특히 철모는 한반도 출토 단봉식(短鋒式) 세형동모(細刑銅矛) 형식과 비슷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철제무기 세트류는 기원 2세기대의 영남 지역 고분출토품과 유사하여 당시 해로를 통한 문물의 유입 가능성을 보여주는 유물로 평가되고 있다(국립제주박물관·2001).


탐라국 시대 서귀포시 대정읍 하모리 지석묘는 남방식 형식을 취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탐라국 시기 이후에는 이상하리만큼 탐라국의 민간무덤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탐라국시대에서 고려 말까지 탐라국의 왕릉, 고려시대의 성주의 무덤들은 어디로 갔을까? 이 문제는 추측만 하고 있을 뿐 아직도 정확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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