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容恕)의 아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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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국 제주테크노파크/행정지원실장/논설위원

누구를 용서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내 것을 양보하거나 포기하기 때문이다.

양보나 포기는 어떠한 형태든 손해감수가 전제(前提)된다.

손해는 배상 또는 보상이 따라야 하는데, 용서에는 그러한 반대급부가 수반되지 않기에 용서는 아픈 것이다.

‘서로 이해해라’, ‘조금씩 양보해라’ 라는 표현을 종종 쓰게 된다.

이 표현을 꼼꼼히 들여다 보면, 용서의 주체에게 ‘이해와 양보의 객체가 되라’는 강요 또는 종용이 간접적으로 포함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구조적으로 상당히 애매한 상황임을 깨닫게 된다.

‘용서받지 못한 자’라는 영화 얘기를 하려 한다.

서부영화의 살아 있는 전설인 클린트이스트우드(Clint Eastwood)가 주연과 제작, 감독을 맡아 아카데미 4개 부문을 휩쓸었던 영화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한때 청부살인을 업(業)으로 삼던 주인공이 개과천선(改過遷善)하여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평온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러던 중, 불의(不義)를 응징해 달라는 청부살인의 요청을 받게 되고, 자식들을 키우기 위한 금전적 유혹에 빠져들면서 다시금 악(惡)을 저지르게 된다는 내용이다.

영화에서는 용서 받지 못한 자나 용서하지 못한 자, 용서 받을 수 없는 자들이 겹쳐 있다.

구원을 얻으려 하나 평온을 찾지 못하는 우리 인간의 한계를 엿볼 수 있는 영화다.

‘용서 받지 못한 자’와 ‘용서 받은 자’, ‘용서 하지 않은 자’와 ‘용서한 자’의 구별 필요성을 제기하고자 한다.

전자(前者)의 경우는 용서의 객체(客體)들이다.

이들은 광의(廣義)의 죄인(罪人)들이다. 그러기에 이들은 할 말이 없다.

이들에 대해서는 용서 받을 자격이 있는지를 잘 선별해 내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용서받은 자들은 구원을 얻은 양 행세해서는 안 된다.

용서한 자의 또 다른 아픔 유발이 되지 않게 자숙하여야 한다.

이제 후자(後者)들 즉 용서의 주체(主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용서에는 아픔이 따르기에 용서한 자는 아픔을 가슴에 묻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아픔을 가슴에 묻은 이들에게는 한없는 위로와 존경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용서하지 않은 이들을 위해서는 더욱 겸손한 자세로 반성하고 끊임없이 용서를 구해야 한다.

‘실수에 대해 관대한 나라’ 우리나라의 얘기다.

실수라 보기에는 범죄에 가까운 일들에 대해서도 실수라고 치부하며, 때로는 애써 외면하면서까지 아량을 보이는 경우도 흔하다.

심지어 관대함과 아량이 미덕처럼 여겨지던 시절도 있었다.

용서에는 많은 고통과 아픔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리 관대하거나 넓은 아량을 베풀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용서 받지 못한 자들은 분명 존재한다.

용서 못하는 자들도 있다. 용서의 전제가 되는 요소들에 대해서 더욱 냉정한 분석과 고려가 선행되어야 한다.

용서받기 위해서는 용서하는 자에게 수반되는 아픔과 고통을 헤아리고, 그 아픔과 고통의 정도를 넘어서는 존경과 위로가 이행되어야 한다.

이제 이에 대한 실행을 지켜봐야 한다. 설령, 용서를 얻었다 하더라도 결코 당당해서는 안 될 일이다.

용서는 아픈 것이기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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