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산 김씨 입도조 김윤조 방묘.(고려말)

▲경제력 없어 지키지 못하는 제도
고려시대 일반인의 분묘는 관과 곽을 썼는데 곽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그중 부자에 해당한다. 그러나 일반 민중들에게는 장례를 격식 갖추어 거행한다는 것 자체가 무척 힘든 일이었다. 일제강점기(1931년)에 일본인 학자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의 ‘韓國의 風水’라는 저서에 보면 고려시대 일반인 분묘에 대해 언급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묘광의 방향은 남향 쪽으로 둔 것이 일반적이고, 그 길이는 6~7자, 폭은 1자 8치~2자, 깊이는 2자 2, 3치~3자 정도이며 대게 광의 주변에는 아무런 가공을 하지 않는다.


△관을 준비할 수 없었던 가난한 사람은 거적으로 시체를 싸서 그대로 묻고, 관을 사용한 사람은 목제와관(木製臥棺·목관, 필자)이다 -고려시대에는 화장을 하지 않는 자가 많았다 -관은 부자가 아니면 쓸 수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관은 북쪽 또는 높은 곳을 머리로 해서 광(壙) 안에 넣고 관 밖의 머리 쪽에 액체를 넣은 항아리와 식기용 자기(磁器)와 숟가락을 놓고-숟가락이 없는 경우도 있음-동전을 관 위에 두며 기타 두세 가지 물품을 부장(副葬)한다.  


△항아리에는 뚜껑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


△식기는 엎어둔 것과 바로 둔 것이 있어 일정하지 않다.


△병은 식기의 오른쪽이나 왼쪽에 두어 일정하지가 않다.


△부장된 기구는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지만 때로는 깨어진 폐기(廢器)도 부장했다.
광에 관을 안치시키고 부장품을 배열한 후 흙으로 광을 메우고 그 위에 봉토를 덮은 것은 분(墳)이다(관이 썩으면 흙이 약간 밑으로 떨어진다). 광역(廣域) 안의 흙이 약간 부드러운 것은 이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두 번째 항목인데 ‘관을 준비할 수 없었던 가난한 사람은 거적으로 시체를 싸서 그대로 묻는다’는 내용과 ‘고려시대에 화장을 하지 않는 자가 많았다’는 사실이다. 귀족 계층과 달리 민중들은 관조차도 마련하기 어려웠고, 불교식 화장은 많은 비용이 들어 나라에서 권장하더라도 그런 장례를 치를 수가 없었다.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경제적인 능력이 없으면 축소되고 약식으로 변형되거나 아예 그 제도를 따를 수 없게 된다. 제도란 그것을 지킬 수 있는 경제적 능력에 따라 달라진다. 고려시대 민중들의 장법이 자유로운 것은 민중들 스스로 그럴 수밖에 없는 경제적 현실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상·장례는 효도라는 성리학의 예제(禮制) 이념 때문에 그것을 지키려고 돈을 꾸어서라도 많은 돈을 들이면서 장례를 행했다.


▲고려 시대 민묘가 없는 이유  
사실상, 고려시대의 제주의 장법을 추측해보면, 경제적으로 어려워 장례비용을 마련할 수가 없어서 입은 옷을 수의 삼아, 또는 거적으로 시신을 싼 후 땅을 조금 파서 관곽(棺槨) 없이 평장으로 장사를 지낸 까닭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분명 제주에 사찰이 많았던 것으로 미루어 토호·귀족들은 불교적인 화장법을 선호했을 것이고, 평민들은 몽골로부터 100년 가까이 지배당한 경험이 있어 북방 몽골의 평장법(平葬法) 등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또한 제주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 관리들의 방묘에서 볼 수 있듯이 산담을 두르지 않은 대신 석축으로 봉분을 보호하는 묘제가 존재했다.

 

고려시대의 방묘는 토광묘다. 제주에서는 조선 초기까지도 방묘(方墓)가 나타나며, 원묘(圓墓) 또한 간혹 조선 중기(17세기)까지도 혼재되어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소위 왕도(王都)에서 멀리 떨어진 변경(邊境)이라 그런지 묘지 제도 또한 변화의 속도가 늦게 나타나고 있다. 하나의 문화권에서 만들어진 양식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하나의 양식이란 서서히 얼음이 어는 것처럼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는 것이다. 상고(詳考)해보건대 제주에서 ‘방묘(方墓)’라는 말을 가장 먼저 쓴 사람은 누구일까. 오늘날 문화재 발굴과 관련해서 생각해 보면, 진재(震齋) 이응호(李膺鎬, 1871~1950)가 아닌가 생각한다.

 

   
▲ 경기 김씨 입도 4세 감자신 방묘.(조선 초기)

아마도 그가 쓴 ‘耽羅國書’라는 제주 약사(略史)에 ‘방묘’ ‘원묘’라는 말이 보이기 때문이다. 방묘의 ‘方’이란 ‘네모나다’ ‘각이 지다’라는 말로, 방묘라 부르게 된 것은 모양이 ‘각이 진 무덤’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방묘는 원묘(圓墓), 용묘(龍墓)와 같이 눈에 보이는 무덤 형태를 지칭한 것이다.     


▲방묘, 고려 관리들의 무덤
사실상 고려시대 제주에는 조선시대처럼 무덤이 많지 않았다. 현재 전해오는 제주의 방묘를 보더라도 평지에 무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름 능선에 무덤이 조성돼 있어서 목마장의 마소에 의해 무덤 훼손이 덜 했을 것이다. 고려시대의 방묘는 구좌읍 김녕리 묘산봉 광산김씨 집안의 방묘에서 보는 것과 같이 무덤 주위에 판석으로 튼튼하게 둘러져 있어 산담이 등장하기 이전의 양식을 엿볼 수 있다. 또 제주 고씨 집안의 고조기의 방묘처럼 판석은 두르지 않고 사각 모서리에 깬 돌을 박아 무덤이 무너져 내리지 않게 조성한 경우도 있다. 적어도 고려시대 관리의 무덤은 판석을 주로 사용하여 무덤을 보호하는 방식이 흔했다는 것이다.  

 

고려시대 방묘는 손가락을 꼽을 정도로 매우 드물다. 그 많은 일반 사람들 주검의 흔적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이처럼 제주에 고려시대 묘지가 없는 것에 의문을 느낀 김인호(金仁顥) 선생은 ‘7세기 후반에 유리도라(儒李都羅), 도동음률(徒冬音律),서기 676년 9월에 일본에 간 탐라왕 고여(姑如)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탐라국 태자 말로(末老), 1029년(현종 20년) 고려에 온 탐라세자 고오노(孤烏弩)’ 등이 사서(史書)에는 나오지만 이들의 무덤이 없는 것에 대해 가설로 제시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제주의 장법을, ‘가매장한 다음 봉분을 만들지 않는 오끼나와(沖繩) 장법과도 유사한 ‘生殯埋之後 上不起墳’에서 찾고 있다. ‘生殯埋之後 上不起墳’이란, 말 그대로 제주의 가매장 전통인 생빈눌과 유사하다고 하면서, 그런 가매장 후 남은 뼈를 주워(洗骨) 모아 봉분을 만들지 않고 평장(平葬)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고려시대 제주에 민묘가 없는 까닭은 ‘일반인인 경우 15세기 초까지 넓은 의미에서의 풍장(風葬)을 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