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왕자묘 1호분. 고려시대 묘제.

▲고려의 묘지 제도


고려시대 제주의 민묘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고, 약간의 고려시대 방묘를 제외하고는 실체가 거의 없는 편이다. 사실 제주의 들녘에는 수많은 묘지가 있지만 대개가 조선시대의 묘지로써 조선시대 예사상의 영향 아래에서 이루어진 것들이다. 일반적으로 오늘날까지 봉분의 맥을 이어주는 한반도의 장법은 삼국시대를 기점으로 보면, 신라시대의 봉토분으로부터 시작된다.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신라시대의 장법은 봉토분에 호석(護石)을 두르고 사자상이나 문무인 석상을 세우는데, 이런 문화적 연원은 중국 전한(前漢)시대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고려시대가 되면 불교의 영향으로 화장(火葬)이 널리 보급되었으나 매장(埋葬) 또한 병행하여 성행하였다. 고려시대는 원묘와 방묘가 동시에 존재했다. 특히 공민왕과 노국 대장공주의 왕릉은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의 건원릉의 모델이 되었고, 이로 인해 조선시대 왕릉은 모두가 건원릉의 법도를 따르게 되었으나 건원릉의 내부 시설의 방법에 대해서는 조선 초기 훈구세력과 신진사대부 세력의 쟁점으로 석실묘 대 회격묘라는 대립이 되기도 했고, 세종대에 이르러서 고려시대의 무덤 형식은 배제되었지만, 조선의 양반 사대부 무덤은 회격묘로 채택된 대신, 왕릉은 여전히 석실묘와 회격묘를 절충하는 것으로 정착되었다.

   
▲ 조선시대 왕릉의 모델이 된 고려 공민왕릉.

“예술영역에서는 형식을 통해서 한 시대가 구현되는데 그 형식 중에서 급진적으로 새로운 형식이 나타나는 일은 언제나 아주 드물다. 한 시대의 형식들이란 대부분 훨씬 오래전 형식들에 의해 생겨 난 것들이다.”라는 한스 제들마이어의 말대로, 형식의 문제는 예술영역뿐만 아니라 문화영역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 고려시대의 석실묘는 삼국시대의 전통을 이어받고 서서히 변형되었으며, 조선시대 또한 중국의 무덤 형식을 ‘가례’의 도입을 통해 이입되었고, 그것의 적극적인 수용을 통해서 조선시대 600년을 넘어 오늘날까지도 아직도 그 영향이 남아있다. 이런 결과는 문화의 영역에서는 ‘전달된 문화(transmitted culture)’ 라고 부른다.

 

이 전달된 문화라는 개념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각기 다른 관념과 가치를 습득하여 발생한 차이를 말하는 것이다. 사실상 이는 문화전파를 말하는데 새로운 사상과 가치의 습득으로 인해 성립된 왕조가 그것을 국가 차원으로 확대하게 되면 그 문화의 전파는 매우 빨리 제도적으로 정착할 수 있다. 외부의 문화가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수용하려는 내부의 도움 없이는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고려시대 제주의 무덤 형식


방묘는 직사각형 모양의 무덤 형태이다. 방묘는 원묘와 더불어 조선 초기까지 한반도 전역에 보급된 묘지 형식이다. 제주에서는, 방묘는 조선 초기까지, 그리고 원묘는 조선 중기까지도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제주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고려시대의 방묘는 문경공 고조기 무덤이 가장 오래된 무덤이며, 광산김씨 傳김윤조, 傳김수의 방묘 또한 고려시대의 방묘들이 전해온다.

 

여말선초에 이르는 시기의 방묘는 여러 성씨의 입도 조의 방묘, 혹은 원묘가 남아있으며, 제주의 무덤 대다수가 조선시대 용묘라고 할 수 있으며 이 형식은 조선 중기 이후 2000년 이전까지 제주 무덤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나 지금은 시대의 변화로 인해 화장 후 납골장이나 수목장이 성행하고 있다. 국토이용계획에 따라 국가의 새로운 장례제도의 권장은 제주의 자연경관을 원천으로 바꾸고 있으며, 각종 개발과 무덤 관리의 어려움으로 산담이 빠르게 사라지면서 정겹된 제주 특유의 문화경관을 다시 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제주 무덤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고려시대의 묘제를 알아야 한다. 제주에 알려진 고려시대의 무덤들이 희소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려시대 장법은 어떠했을까?


중국 송나라의 사신이었던 서긍(徐兢, 1091~1153)은 1123년 고려에 사신으로 와 개성에서 한 달간 머물렀는데 이때 고려에서 보고들은 것을 후일 귀국하여 황제에게 책으로 엮어 바친 것이 바로 ‘고려도경(高麗圖經)’이다. 이 책 ‘잡속(雜俗’조에는 당시 고려시대의 장례 풍속을 알 수 있는 기록이 나온다. “죽어 염할 때 관에 넣지 않는다. 왕이나 귀족들도 그러하니, 장사 지내는 기구가 없는 가난한 사람은 들 가운데 시체를 버려두어 봉분도 만들지 않고 나무도 심지 않으며, 개미나 까마귀, 솔개가 파먹는 대로 놓아두지만, 아무도 이를 그르다 하지 않는다. 제사 지내기를 좋아하고 부처를 좋아하며 중을 참여시켜 범패를 부르게 한다.”

 

   
▲ 고려시대 석상.

고려시대 한반도에서는 화장과 매장이라는 장법이 널리 이용되었다. 화장은 고려시대 지배층에서 이용되었고, 일반 서민의 경우 대체로 관도 없이 구덩이에 시신을 그냥 매장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는 사체를 그대로 땅에 두고 그 위에 풀을 덮어 인적이 없는 산야에 방치해 두는 풍장(風葬)이 간혹 이용된 것으로도 보인다.


서긍의 기록처럼, 가난한 사람 중에는 간혹 풍장(風葬)처럼 보이는 시신 유기(遺棄)가 성행하여 조장(鳥葬)처럼 새의 밥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가난한 서민들은 특정 장소에 시체를 유기(遺棄)하는 고려장이 성행했다. 1124년(인종 2년)에는 가난하여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관청에서 장례비용을 지급하기도 했다.


조선 초기 백일탈상(百日脫喪)의 풍속은 고려시대의 유습(遺習)이다. “원래 부모의 상을 당하면 관리는 관직을 그만두고, 상례를 집행해야 하는데, 고려시대에는 관리들에게 오복제도(五服制度)에 따라 참최 3년과 자최 3년은 각각 100일, 자최 1년은 30일, 대공 9월은 20일, 소공 5월은 15일, 시마 3월은 7일의 휴가를 주었다. 또한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각 1일, 대상·소상제에 7일, 담제에 5일의 휴가를 주어 3년 상을 마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이러한 약식 3년 상이 허용된 오복제도의 취지는 벼슬살이를 통해 경제생활을 운영해 나갈 수밖에 없는 양반사대부〔士族〕를 배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무덤에 살며 3년 동안 무덤을 지키는 사족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것을 지키는 일이 워낙 고된 일이라 매우 특별한 일로 인식되었다. 오히려 사족(士族)·관인(官人)들은 부모상에 따른 100일 동안의 휴가에 따라 백일 만에 상복(喪服)을 벗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00일의 휴가는 본래 관직자를 위한 것이었으나 사회지도층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이 100일 만에 상복을 벗자 재야사족(在野士族)들이나 서민들도 모두 추종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