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4월 19일 학생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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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근필 전 美버지니아주 한인회회장

기억한다. 4월 19일 서울광화문 광장에서도 3월 15일 집권 자유당이 정·부통령 부정선거를 저질러 학생과 서울시민들이 합세해 자유당 제1공화국을 갈아 보자는 저항 운동이 일어났다.

나 역시 대학생으로서 자연스럽게 서울의 대학생, 고교생, 서울시민들의 시위대 함성 속에 섞여 있었다. 이날 데모대와 경찰과의 대치 상황은 옆에서 목격했던 역사의 증인으로서 말하고 싶다. 당시 경무대(청와대) 정문 앞에 모여든 대학생들이 효자동 길목을 막았기 때문에 광화문광장에 모였던 학생들은 교통 혼잡으로 청와대 방향에 가있는 데모대와의 통신이 두절된 상태였다. 청와대쪽에서 간간하게 총소리는 들렸지만 청와대 경찰들이 쏜총에 180명의 학생이 죽고 6500여 명이 부상을 입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약100만명의 시민이 모였기 때문에 만약 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사실을 알았다면 광화문 인파들이 청와대에 돌격해 청와대는 화염에 쌓였으리라 믿는다.

 

이날 서울시내에 있는 자유당본부, 서울신문사, 장관집, 파출소들이 불탔으며, 서울의 인파는 적어도 200만명으로 늘어났다. 4월 19일 집권당 자유당 독재체제는 쇠망의 기로에 진입하고 권력의 횃불이 꺼져 서울의 행정은 완전 마비상태에 들어갔다. 소위 무정부 상태였다. 이날 학생들의 많은 희생은 ‘학생혁명’이라는 위대성으로 세계언론들이 보도했다. 자유당 정권의 몰락과 국민들이 원하는 자유민주주의 정체성은 높은 평가속에서 새로운 정부를 탄생시켰다.

김영삼정부가 들어오면서 4·19학생혁명의 학생을 뺀 4·19 민주혁명으로 바뀌었는데 민간인들이 합세함으로써 혁명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헌법전문에 1919년 3월1일 독립정신과 4월 19일 민주혁명은 한국민주정치 정신의 기간으로 기록 됐다. 이는 위대한 정치유산이라는 의미다.

1960년 2월 28일에도 정·부통령선거 부정선거운동이 감지돼 대구시내서 반정부 데모가 일어났다. 사실대로 3월 15일 대통령선거는 부정선거로서 국민의 원성은 멈추지 않았다. 3월 15일 밤 마산고교 학생들과 마산 시민들이 합세해 불법선거에 대한 항의 시위는 폭력으로 이어졌다. 몇 일 후 행방불명이 된 고등학생 김주열군이 최루탄에 맞은 채 시체로 인양되면서 정치사태는 비상체제로 들어 갔다. 당시 민주당 당원들의 항의 시위는 많이 있었지만 정부를 전복 할만한 힘은 없었다.

1960년 4월 18일 드디어 서울에있는 고려대학 3000명의 학생들이 서울시에 들어와 반정부데모를 벌였다. 저녁 무렵 귀갓길에 자유당 특별대 소위 깡패들로 구성된 무장집단에게 약 10명의 고대 학생들이 큰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순식간에 서울 각 대학에 전파되어 4월 19일 아침부터 광화문광장에 학생들이 집합했다. 4월 19일 학생혁명의 불씨다.

짧은 7일간의 국민투쟁은 결과적으로 자유당정부의 쇠망을 가져왔고, 1960년 4월 26일 이승만대통령은 부상 당한 학생들을 위문한 후 대통령직에서 사임한 다음 날 4월 27일, 빈손으로 미국 하와이로 망명한다. 제2공화국을 연 민주당은 내각책임제로 장면 정부를 수립시켰다. 이 시기에 육지 대학에 등록된 제주출신 학생은 30명 정도였다. 서울을 중심으로 대구, 부산, 제주도지역에서 4·19 데모에 참여한 당시학생들이 모여 조직된 4·19혁명기념회가 지방분회로 설립되어 제주도에있다. 전 우근민 도지사와 원희룡 지사의 협조로 제주시 KCTV 길 건너편 공원에 4·19혁명 기념탑이 세워졌다.

서울과 제주도, 지방 두 곳에 세워진 기념탑들은 영구히 자유민주주의 횃불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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