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성지(聖地)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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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성안’의 여름-
김찬흡. 국사편찬위 사료조사위원

나라를 되찾은 기쁨에 나는 만 14세의 어린 몸으로 중학 입시에 응시하러 처음으로 ‘성안’에 가게 됐다. 해방을 맞이한 환희와 회한의 한 해가 지나고 다음 해 3월은 참으로 어수선한 시기였다.

출발에 앞서 할아버지 댁을 인사차 찾아갔다. 나의 손을 잡고 “성안에 가거든 꼭 제주향교와 오현단을 순례(巡禮)하라.” 유교에 철저히 수신(修身)하신 엄한 말씀을 지킬 것을 다짐했다.

출발하는 날 어머니는 정성 들여외따로 상(床)을 차려 주셨다. 어려운 ‘곤밥’을 들며 과거 보러 가는 기분인 양 발걸음도 가벼웠다. 아버지께서 “가는 길 애월교(涯月校)에 들려 선생님들께 인사를 올린 뒤에 가자구나!”하셨다. 당시 교장은 장제필(張濟弼), 담임은 홍규표(洪圭杓) 선생이었다. 여러 선생님의 격려는 따스했고 반드시 합격으로 보답하겠다고 결심했다.

아버지는 차로 가자는 것을 나는 걸어 가겠다고 고집했다. 나의 외가 신엄(新嚴:엄쟁이)까지는 가보았지만 그 동쪽은 나의 첫 길이어서 견학하고 싶었기 때문이며, 더구나 외도(外都:도그네)에 있는 동익(東翼) 종형을 만나고 싶어 고집했던 것이다. 종형은 애월교 교감에서 바로 외도교 교장이 됐으니 찾아뵙는 것이 예의로 보았기에 아버지도 나의 뜻을 따른 것이다.

비행장도 보고 서문로에 들어서니 내 4촌 누이가 길에서 ‘와다리 하시’라는 놀이를 하고 있어서 반가웠으며 지금 생각하면 당시 자동차가 얼마나 없었기에 그런 놀이를 했을 까 싶다. 숙부 댁에서 밤을 보내고 이튿날 제주향교에 들려 명륜당에 가보니 책걸상은 모두 파괴되어 있어 교실풍경은 살벌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공자와 동방(東方) 십팔현(十八賢)을 모신 대성전(大聖殿)은 이상이 없어 퍽 다행스럽게 여겼다.

다음 오현단을 찾으니 1922년 착임(着任)한 제농(濟農) 제3대 교장 미마-요네기치(美馬米吉) 순직비가 부서져 흉물이 돼 있었다. 미마는 철저히 ‘국제인’, ‘범세계주의자’ 등의 의미를 지닌 코스모폴리탄으로 황민화(皇民化) 교육을 배척한 민본 사상가였다. 그는 도덕 시험에 “일본인을 찬양하거나 군림하는 답안지를 쓰면 감점을 주었다.”고 후일 홍정표(洪貞杓) 교장이 증언했다.

또 ‘미마’ 교장은 정구와 야구를 처음으로 도입해 보급한 선각자였다. 그만 뇌출혈로 순직해 온 도민이 그를 추모해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당시 민전(民戰)과 민청(民靑)은 ‘파괴는 곧 건설’이라는 괴변으로 일관했으니, 1947년 3·1 시위로 그들의 세계가 온 듯이 미쳐 날뛰었다.

이해 7월 3일 입시를 보고 나서 지방 일간지 기사에 합격자 100여 명이 발표됐다. 연말에 애월교 교감 동식(東湜) 종형이 “야! 애월교 출신 11명 중 아우가 1등이었어”했고, 나는 “음악·미술·체육 교과가 없어 동창 김지수(金池洙)가 1등이었을 겁니다.” 했다. 나중에 보니 그는 실과에 실패했던 것 같았다. 나를 자랑하려는 뜻이 아니라, 성적 내용을 모교에 보내고 추수(追隨) 지도를 하는 방법이 오늘에도 교육현장에서 실현할 수 있는 좋은 교육방법이 아닐까 해서 하는 소리다.

일언지하(一言之下)에 한해가 지나 봄은 4·3이란 빨간 홍자(紅字)가 세상을 눌러, 손을 목에 대고 ‘내가 살았구나!”를 느끼는 암울이 대학 생활까지 이어진 비극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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