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제도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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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란.

할머니! 여긴 왜 이렇게 쓸쓸해 난 사람들이 북적북적하는 게 좋아!

얘야! 창밖을 보렴! 너를 반기느라 새들은 노래하고 나무는 손짓하는데?

서울과 제주 사이에 가로 놓인 바다보다 더 넓어 맞닿을 수 없고 메꿀수 없을 듯했던 손주와의 소통까지 걸린 시간은 촌음에 불과했다.

마녀가 사는 숲이 무섭다더니 깡총거리며 뛰어다니기까지도 마찬가지였다. 아득했던 이질감들이 어우러진 손주와의 빛나는 시간들이었다.

어린이는 어른의 스승이자 동시에 노인들의 정령이었다. 그리곤 다시 짧은 만남은 끝나고 긴 이별이 시작됐다.

여보 숙제 마치느라 수고했어!

숙제라니요? 숙제가 아니라 선물인데요!

누군 적막하다고 누군 부럽다고도 하는 제주 중산간 일상은 자연과 깊숙이 맞물려 있다. 방문한 지인들 대부분 잠깐 다녀가는 곳으로 족할 뿐 일상을 내리고 싶진 않다고 한다.

그러면 몇 년 새집 값을 천정부지로 올린 이들은 누굴까? 우리 골목만 해도 그사이 세 집 주인이 바뀌었다.

일상을 내리고 싶지 않다던 지인들 말이 달라졌다. 서울살이 시절 뒷북만 쳤던 집 장만과는 다르게 선견지명으로 부자 됐다고…. 글쎄 부부가 잘 늙어 갈 스무 평 남짓 집 한 칸 소유도 부자라면 부자인 셈이다.

그럼에도 육십대 부부 일상이란 단조롭기로만 치자면 한겨울 푸르른 붓순나무와 흡사하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그저 스쳐 묻히는 잔엽들이 일년 내 초록 잎들을 풍성하게 만들고 수없이 발아하는 씨들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이 웬만한 다툼으론 꿈쩍도 않는 부부의 튼실한 감정선을 닮았기 때문이다.

선물 중 으뜸이며 손님 중 젤로 큰 손님인 며늘애와 손주는 붓순나무 잔엽들과는 생판 다르다. 튼실한 부부 감정선에도 크고 작은 균열을 만드는데 그걸 숙제로 선물로 지칭한 것이다.

콩나물 교실이란 표현이 과하지 않았을 우리 세대 학교 수업은 일방적 주입식과 푸짐한 숙제로 이루어졌다. 당연히 숙제 검사는 중요했기에 그 덫에 걸려 버둥대는 꿈을 꾸곤 한다.

물론 노인기로 접어 든 지금까지도 그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으나 언제부터인가 제주살이가 무르익을 무렵 즈음 숙제는 선물의 다른 이름이었음을 깨달았다.

갑작스런 골목 손주들 술래 되기, 예고 없이 찾아든 손님에게 토속 음식 대접하기 등 이 모두가 선물이 됐다.

올 초 특별한 선물이 있었는데 바로 골목 식구 중 롤모델이신 노부부의 아름다운 귀향이셨다.

눈부신 첨단시술로 보행의 자유를 쟁취하시느라 비우셨던 두 분 보금자리 채우는 일은 설레고 흐뭇한 선물이었다. 반년여 쌓였던 빈 일상의 먼지를 털어내고 노부부의 일상적 시공간을 확보하는 즐거운 작업 후 따뜻한 만남은 선물의 백미였다.

그리고 으뜸 선물인 손주 녀석이 일 년 반 만에 다시 5박 6일을 다녀갔다. 비자림 산책, 메이즈 랜드, 아쿠아 플레넷, 조랑말 타기 등 빡빡한 일정으로 닷새 동안 오전 9시면 집을 나서는 여섯 살배기 수준으론 강행군이었다.

넌 정말 볼매구나! 할머닌 나보고 메주라는 거야? 메주는 무슨 볼수록 매력 덩어리란 뜻이야!

기억을 더듬어 찾아낸 최신 유행 어로도 언어 코드의 장벽은 끝내 넘지 못했다. 극과 극인 서로의 일상이 내겐 선물로 버무린 시간이었듯 손주 녀석도 그랬을까?

첨단의 디지털 문화에 노출된 여섯 살배기에게 청정한 아날로그적 제주 일상이 선물이 됐기를 바랄 뿐이다. 가끔은 숙제감이 발생해도 그조차 선물로 받아 안을 수 있는 너그러운 제주 할망이 되고픈 욕심을 부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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