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 제주목사의 집정실로 사용됐던 연희각 전경.

제주목 관아 건축물 가운데 연희각(延曦閣)은 목사의 집정실로 사용됐다.

제주목사는 정3품 당상관(堂上官)으로 정치는 물론 행정·군사·사법 등 전권을 행사했다. 그래서 연희각은 백성들의 삶과 안위를 좌우했던 곳이다.

조선왕조 500여 년(1392~1910년) 동안 286명의 제주목사가 배출됐다. 선정자가 있는 반면 탐관오리도 있었다.

기건 목사(재임 1443~1445)는 겨울에도 알몸으로 물질하는 해녀를 안쓰럽게 여겨 평생 전복과 미역을 입에 대지 않았다.

이약동 목사(재임 1470~1473)는 겨울철 백록담에서 한라산신제를 지내면서 백성들이 동상에 걸리고 목숨을 잃자 신단을 아라동 산천단으로 옮겨 제를 봉행했다.

그는 이임 시 관물과 관복을 두고 떠나는 도중 말채찍을 손에 쥐고 있자 이마저도 기둥에 걸어 놓고 퇴임했다.

1619년 부임한 양호 목사는 탐학이 극도에 달해 여러 차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으나 광해군의 비호로 무마됐다.

백성들은 그를 호랑이를 대하는 것처럼 두려워했다. 벼슬에 쫓겨나도 제주에 남아 행패를 부리던 그는 1623년 반정이 일어나 인조가 즉위하자 처형됐다.

상피제(相避制)를 엄격하게 적용한 조선시대에 제주 출신은 제주목사로 임명될 수 없었다.

변방에 근무하는 수령의 임기는 2년 6개월(900일)이지만 제주목사의 평균 재임기간은 1년 10개월에 머물렀다.

 

   
▲ 연희각에서 아전에게 영(令)을 하달하는 제주목사를 재현한 장면.

초대 목사는 1393년(태조 2) 부임한 여의손이며, 마지막 목사는 일제강점이 시작된 1910년 임명된 서병업이다.

사료에 따르면 연희각은 1600년대 중엽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건물은 겹처마에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팔작지붕으로 지어졌다.

이 건물은 1884년(고종 21)에 홍규 목사가 다시 고쳐지었으나 1924년 일제가 허물었다. 제주시는 2002년 연희각을 복원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이며 건축면적은 136.63㎡(41.33평)다.

제주의 1인자인 목사가 정사(政事)를 살피던 연희각은 상아(上衙)라고 불렸다. 2인자인 판관의 거처와 집무실은 이와 구분해 이아(二衙)라고 명명됐다.

제주목사는 군직(軍職)을 겸했다. 조선 초기에는 만호(萬戶) 또는 안무사(按撫使) 직함이 부여됐다.

조선 중기부터 절제사(節制使) 또는 방어사(防禦使)를 겸직했다. 이는 명칭의 차이일 뿐 본질적으로 군사령관을 겸임한 것이었다.

제주목사로 발령은 났으나 일신상의 이유로 부임하지 못했던 이도 12명이나 됐다.

가장 오래 재임한 목사는 이경록으로 1593년부터 1599년까지 6년간 재임했다.

그는 임진왜란의 발발로 이임하지 못했고, 성산일출봉에 성곽을 쌓던 중 풍토병에 걸려 제주에서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