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장례에 대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장법을 장려하고 있다. 2000년 들어 기본적으로 화장과 매장으로 구별할 수 있으나 점점 화장이 늘어는 추세다. 한 때 화장 후 납골장이 성행하다가 지금은 평장, 수목장이 정착되는 추세다. 2015년 제주도 사망자 3418명 가운데 화장자는 2018명으로, 화장률은 63.9%(제주시 68.9%·서귀포시 53.4%)로 전국 2천95%(2014)에 비해 약 10% 정도 낮은 수치다. 지금 그렇게도 성행했던 조선시대 매장 문화는 자본주의라는 사회구성체의 변화로 인해 역사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고, 수치가 보듯이 오늘의 대세는 화장장이다. 현재는 어제의 능동형이다. 장례문화에 대한 오늘의 사회적 변화는 어떤 제도도 영원할 수는 없다는 것을 역사는 가르쳐준다.

 

   
▲ 조선 초기 매장문화를 엿불 수 있는 무덤.

▲제주도 상장(喪葬) 제도의 시작
‘태종실록(太宗實錄)’ 11년(1411) 11월 병술(29일)에, “전 총제(摠制) 고봉례(高鳳禮)가 죽었다. 고봉례는 제주인이다. 임금이 몹시 슬퍼하여 대언(代言)에게 명하기를 ‘이 사람이 과인(寡人)을 사랑하고 사모하여 멀리 친척을 떠나와서 벼슬하므로 대단히 불쌍히 여겼다. 지금 죽었으니 내가 몹시 슬프게 여긴다. 상장(喪葬)의 제구를 모두 부의(賻儀)하라’ 하였다. 양전(兩殿)이 모두 제사의 부의로 종이 150권과 촉(燭) 10자루, 쌀과 콩 40석과 관곽을 하사하였다.”


‘태종실록(太宗實錄)’ 13년(1413) 6월 무오(11일)에, 제주 도안무사(都安憮使) 윤임(尹臨)이 효자(孝子) 절부(節婦)로서 포상(褒賞)할만한 자를 아뢰었다. “효자와 절부(節婦)로 포상(褒賞)할만한 자는 전 직장(直長) 문방귀(文邦貴)ㆍ제공(提控) 양심(梁深)ㆍ생원(生員) 고득종(高得宗) 등은 부친상을 당하여 묘소 곁에다 여막(廬幕)을 짓고, 처음으로 3년의 복제(服制)를 행하니 한 고을이 감모(感慕)하자 (……) 의정부에 계하였다.


이 실록으로 미루어 유교식 상장(喪葬)제도가 없었던 ‘3년상’이 조선 초기에 도입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세종실록(世宗實錄)’ 2년(1420) 정월 21일의 기록은 조선 개국 이후 처음으로 제주에 유교식 매장제도가 적용되었음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당시 제주도 사람 중 묘지에서 여막살이를 하며 무덤을 지킨 사람(守墳者)은 3인이고, 3년상을 행한 사람은 10여 인에 불과했다. 또, 이 기록에 의하면 태종 6년(1406년)에 주부(注簿) 벼슬이었던 문방귀가 부친(父親) 상례(喪禮)를 ‘가례(家禮)’에 따라 행하였고, 분묘를 3년이나 지키는 유교식 제도를 이행하여 제주사회에 새로운 기풍을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방귀는 3년상을 행하지 않았던 제주의 풍속을 깨고 처음으로 유교식 3년상을 치른 사람으로 회자되고 후에 효자(孝子)의 포상(褒賞)까지 받게 된다. 조선 개국이 1392년의 일이니 개국 후 14년이 지난 시기에 해당한다.     


1411년에 고봉례가 죽자 임금이 슬퍼하면서 그의 아들 고득종(高得宗)에게 관곽을 하사한 때보다 이미 5년이나 앞서 유교식 제도를 수용한 문방귀는 맨 처음 제주의 장례풍속을 바꾼 사람이 되었다.


제주의 장법에 대해서는 아직도 밝혀내야 할 내용이 많지만 아무튼 문방귀가 유교식 상장제(喪葬制)를 받들기 이전에는 제주의 장례 풍속은 다른 형태로 존재했을 것이며, 조선초기부터 설령 유교식 장례법이 행해졌다고 하더라도 그 영향이 곧바로 민간에 두루 미치지는 않았다.

   
▲ 외담 산담을 이용한 평장.

▲염습하고 관을 사용하도록 가르친 기건
조선 말기의 문신 이유원(李裕元·1814∼1888)의 ‘임하필기(林下筆記)-제주(濟州) 장례의 시초’에 아예 기건(奇虔·? ~1460)의 행동을 제주 장례의 시작으로 소개하고 있다. ‘기건(奇虔)이 제주 목사(濟州牧使)에 제수되었다. 그런데 제주의 본래 풍속이 어버이를 장사 지내지 않고 죽으면 시체를 구렁에다 갖다 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건이 아직 부임지에 도착하기 전에 먼저 고을에 지시를 내려 관곽(棺槨)을 갖추어 습렴(襲殮)을 해서 장사 지내도록 가르쳤는데, 이 고을에서 어버이를 장사 지내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때부터 비롯되었다. 하루는 그의 꿈에 3백여 명의 사람이 나타나 뜰 밑에 와서 머리를 조아리며 사례하기를, “공의 덕택으로 우리의 해골이 맨땅에 나뒹구는 것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내용은 이미 월사 이정귀(李廷龜·1564~1635)의 문집 ‘월사집(月沙集)’에 실려 있다 ‘제주의 예전 풍속에 부모를 장사 지내지 않고 죽으면 곧장 언덕이나 구렁에 버렸다. 공이 부임하기 전에 먼저 고을에 영을 내려 관곽을 갖추고 염습하여 장사지내도록 가르쳤다. 제주 사람이 그 부모를 장사 지내는 것이 공으로부터 시작되고, 교화(敎化)가 크게 행해졌다. 하루는 공이 꿈을 꾸니, 삼백여 명이 뜰 아래에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례하기를, “공의 은덕으로 해골이 땅에 드러나는 것을 면하였는데, 은혜를 갚을 것이 없으니, 공이 응당 금년에 어진 손자를 보실 것입니다.” 하였다. 그때까지 공의 세 아들이 다 자식이 없었는데, 과연 이 해에 공의 아들 장령 축(軸)이 아들 찬(?)을 나아서, 뒤에 벼슬이 응교에 이르렀다.’


이 기건의 일화는 ‘임하필기(林下筆記)’에도 다시 수록되었는데 내용은 ‘월사집(月沙集)’과 유사하다. 또 이 글은 다시 제주 목사였던 이원조(李源祚·1792~1871)의‘탐라지(耽羅誌)’등에 기건(奇虔) 목사의 대표적인 치적 이야기로 기록된다.


인류학자 김인호(金仁顥)는 기건(奇虔) 목사의 이야기를 문헌 비판적으로 재평가하면서 이 기록에는 과장과 왜곡, 허위 등이 내포되어 있어서 액면 그대로 믿을 것이 못 되는 자료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 이야기 중 제주의 장법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 있어 매우 흥미롭게 바라보면서 새로운 해석을 가한다. 특히 ‘햇빛과 비바람에 바래 질 처지를 면했다(得免暴露)’ 라는 귀절에서 그는 “15세기 초의 제주도 장례법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어서 다행이라면서 ‘득면폭로(得免暴露)’란 말은 풍장(風葬), 수지장(樹枝葬) 등이 이때까지도 더러 남아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료(史料)의 하나가 되는 용어”라고 말한다. 그러나 기건의 이야기는 분명 고려장을 말하는 것 같다. 아무튼 조선은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성리학의 예제(禮制)를 적극 강조했는데 효야말로 국가의 안정적은 기반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제주와 관련된 유교식 장례 초기의 기록들을 간추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주부(注簿) 문방귀(文邦貴)가 1406년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3년 상을 지켰다.


△고득종(高得宗)은 1411년에 아버지 고봉례가 돌아가자 유교식 장례를 행했다. 


△기건(奇虔·? ~1460)이 제주(濟州) 장례의 시초이다. 


△김정(金淨·1486~1521)이 제주에 귀양을 갔는데 (제주사람들이) 예제(禮制)에 몽매하니 상사(喪事)와 장례(葬禮), 제사 등에 관한 의문(儀文)을 지어서 인도하자 풍속이 크게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