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가 밥벌이를 하겠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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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동철 사회부장

평화로를 가다보면 50m 상공에 거대한 철제빔으로 연결한 육교를 볼 수 있다. 다리 중간에 교각(받침대)이 없는 이 육교는 ‘라멘(Rahmen)교’ 공법으로 설치됐다.

신기술인 라멘교는 다리 중간에 교각이 필요 없어서 계곡이나 절벽 등 상공을 가로지르는 교량 건설에 주로 이용된다. 건설 과정은 양쪽 교각에 H철제빔을 상판으로 올려놓아 조립한 후 장력을 이용해 다리의 강도를 조정한 후 콘크리트를 씌우면 완성된다.

태풍 내습 때마다 하천수가 넘쳐 물난리를 겪은 이유 중 하나는 박스형 철근콘크리트 다리 때문이었다. 콘크리트 다리를 받치는 교각 기둥마다 잡목과 토사가 쌓이면서 물길을 좁게 해 하천 주변의 차량이 쓸려가고 가옥이 침수되는 수해가 빈발했다. 다리 중간에 교각이 필요 없는 라멘교는 물난리를 대비한 최적의 다리로 꼽혔다. 특허를 받은 신공법 교량이어서 수도권 건설업체가 그동안 수주를 독식해왔다.

그런데 2013~2015년 3년간 라멘교 공사는 육지 업체가 아닌 도내 업체가 독차지했다. 12건에 70억원이 넘는 공사를 도내 납품업체와 시공업체 2곳이 수주했다.

놀라운 수주 실적은 제주시 전직 공무원 2명이 업체 대표로 있었기에 가능했다. 70억원이 넘는 공사를 모두 수의계약으로 따낸 이면에는 선배들의 로비와 계약을 밀어 준 후배들이 있었다.

누이 좋고 매부 좋던 시절은 2014년 제주시 오라동 한천 한북교 교량사업에서 틀어졌다. 선배가 납품한 상판 철제빔이 최대 18㎝나 솟구쳤지만 후배 공무원 2명은 기성검사도 하지 않고 공사비 18억4000만원을 지급했다. 도감사위는 감사를 통해 해당 공무원 2명에게 징계를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선배가 대표로 있는 납품업체는 재시공을 거부, 2년간 공사가 중단돼 지금도 차량 통행에 불편을 초래하고 있다. 상판이 솟는 큰 하자를 두고 선배가 배짱을 부린 이유가 있었다. 후배들에게 뇌물을 뿌렸기 때문이다.

검찰이 특허 공법 교량 사업에 칼을 들이댄 결과 현직 공무원 3명, 전직 공무원 1명, 업체 실질 운영자 1명 등 지금까지 5명이 구속됐다.

구속된 공무원 가운데는 선배 업체에 일감을 몰아주는 대가로 아파트를 시세보다 8000만원이나 낮은 가격에 분양 받았다. 선배와 후배 간 수 천 만원의 넘는 금품이 오고 갔다.

토목·건축 기술직 공무원은 물론 제주시 전 공직사회가 참담함을 금치 못하고 있다. 그러나 공직 내부에선 예견된 일이었다는 반응이다. 사전에 막을 수 있었다는 얘기다. 예를 들면 ○○건설업체 ‘장학생’이 대표 사례다. 사업 차 시청을 수시로 방문하는 건설업자는 실무자인 7급 공무원들을 눈여겨보고 접근한다. 처음엔 식사에서 시작해 나중엔 술자리가 이어지고, 명절마다 선물을 주며 친분을 쌓는다.

업자는 더 나아가 금품을 건네고 승진에도 조력하는 등 7급 공무원이 더 높은 자리에 오르도록 지원해 준다. 고위직에 오르기까지 업자로부터 물심양면 지원을 받은 공무원을 업체에선 “장학생으로 키웠다”고 한다는 것이다.

기술직 공무원들은 공직사회에서 학연·지연 등 끈끈한 인맥이 남달랐고 한다. 위계질서가 깍듯해 퇴직한 선배가 건설업체 대표나 임원으로 가면 전관예우를 해준다는 것이다.

한 공무원은 “기술직 선배들이 퇴직 후 밥벌이를 하겠다는데 후배 입장에선 매정하게 거절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여전해 결국 이런 일이 터지고 말았다”고 했다.

하천 교량 비리사건을 통해 앞으로 퇴직한 선배와 현역 후배 간의 관피아(관료+마피아) 관계를 어떻게 끊을지가 선결과제가 됐다.

그동안 많은 선배들이 후배의 승진과 앞날을 위한다며 명예퇴임을 했다. 그러나 이번 사건으로 앞날의 창창한 후배들을 구렁텅이에 빠뜨렸다. “명예롭게 공직생활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데는 후배들의 많은 도움 덕분”이라고 했던 퇴임 소회가 씁쓸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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