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셰익스피어, 괴테의 ‘좋은 색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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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성회 제주대 교수 독일학과/ 논설위원

다시 또 ‘색안경’ 타령이다. 1년여 전에 바로 이 지면에서 ‘색안경’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기에 하는 말이다. 자신이 원하는 ‘좋은 삶’을 위해서는 선입견이나 편견이라는 부작용이 없는 ‘좋은 색안경’을 써야 하는데, 그런 색안경은 없고, 자신이 색안경을 쓰고 있음을 늘 명심하는 것이 차선책은 된다는 내용이었다. 이 이야기를 다시 꺼낸 것은, 누군가의 책을 읽다가 떠오른 생각의 끈이 없었다면 그런 글이 나올 수가 없었을 터인데, 이를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표절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보는 대학사회의 타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내 잘못이다. 이게 1차적인 이유는 아니다. ‘색안경’ 이야기를 또 다시 하고픈 마음이 먼저다. 그래도 그 좋은 생각을 선사한 심리학자와 그의 책을 먼저 언급해야겠다.

‘나를 바꾸는 심리학의 지혜, 프레임’의 저자 최인철은 ‘지혜’를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마흔이 되어서도 달라진 게 없이 ‘옛 성품 그대로’인 자신이 지혜로워졌다고 느끼기에 가장 유리한 방식의 정의라고 한다. 마흔이 되어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지혜를 터득했다는 자신감 넘치는 저자의 말에 이끌려 단숨에 읽었던 2백여 쪽의 이 책은 지금도 내 연구실 책상 위 작은 책꽂이에서 ‘프레임’의 진가를 여지 없이 발휘하고 있다. 내가 읽어낸 이 책의 요지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색안경’을 끼고 산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에 따른 한계를 인정하는 지혜를 얻을 수만 있다면 좋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200여 년 전 독일의 문호 괴테는 이런 지혜를 20대에 이미 터득한 ‘아마추어 자연과학자’다. 그는 아이작 뉴턴에 의해 이미 확립된 근대과학의 주류에도 흽쓸리지 않았고, 훗날 독일 낭만주의를 주도하게 될 젊은 문학도들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진보세력과도 ‘한패’가 되지 않았다. ‘살아 있는 자연’의 참모습은 다수파나 소수파, 그 어느 무리의 영향도 배제한 ‘편견이 없는 관찰’을 통해서만 알 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뉴턴의 광학이론을 반박한, 특히 화가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이 되는, 괴테의 색채론도 가능했고, 인간의 ‘간악골’을 발견하여 해부학에 ‘괴테’라는 이름을 남기는 영광도 누릴 수 있었다. 작가 아닌 자연과학자 괴테의 길은 참으로 외로운 길이었다. 그래도 괴테는 ‘좋은 색안경’을 선택했기에 50여 년 뒤에나마 자연과학계의 인정을 받았고, 21세기가 시작되면서 그의 방법론이 재조명되고 있다.

독일의 자연과학자 괴테의 방법론이 영어권에서 재조명된 것은 그가 죽은 뒤 150여 년이 지난, 21세기 초의 일이었다. 20세기 말 생태위기가 인구에 회자되면서 자연과학자 괴테의 면모가 재조명받게 된 것인데, 이는 그의 방법론인 ‘섬세한 경험론’이 17세기 과학혁명 이래로 서구과학의 주류가 된 근대과학의 환원론적 방법론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주류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괴테가 ‘좋은 색안경’을 선택했음이 이제야 밝혀진 셈이다. 한 순간도 멈추지 않는 ‘살아 있는 자연’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좋은 삶을 영위하려면 누군가가 이미 써 본 ‘누군가의’ 색안경이 아니라 늘 새로운 ‘자기만의’ 색안경을 써야 한다. 친구 따라 강남 가는 것도 그 자체는 잘못일 수가 없다. 자기만의 이유가 있다면 오히려 권장할 일이다.

우리는 또 갈림길에 들어섰다. 나의 색안경에 보이는 이정표는 크게 세 가지다. 잘못된 탄핵정국 바로잡기 이정표, 이명박근혜 적폐청산 이정표, 보복정치를 끝내야 한다는 이정표 등이 그 셋이다. 어느 이정표가 살기 좋은 대한민국으로 통할까? 대한민국과 결혼했다는 혼밥족의 이정표에 놀란 가슴, 또 놀라게 되면 정말 큰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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