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구석구석 아프지 않은 곳이 어디 있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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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구억리 노랑굴

물 항

                             -강 영 란

 

시집 와서 보니 고아인 남편에

깨어진 항 두 개 밖에 없는 집이었다고

가난이란 말조차 쓸어 담을 온전한 자루가 없어서

터진 고망으로 다 줄줄 새 나가더라고

정짓간에 새 항을 들여놓고

물 길어다 채울 때마다 촬촬촬 떨어지는 물소리가

그리 배가 부르고 좋더라고

항을 손으로 쓸어 만지면 그 서늘함이 뚜껑을 열지 않아도

물이 얼마만큼 남았는지 알 수 있었다고

살암시민 또 그렇게 살아지는 거여서

물 항이 물통으로 바뀌고 물통이 수도로 바뀌고

가끔은 수도에서 쏟아지는 물이 하도 고마워서

오래도록 몸도 씻게 된다고

 

정짓간에서 귤나무 아래로

물 항에서 촘 항으로 자리가 바뀌었지만

어떤 날 항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촘 항에 물이 말라 우멍한 눈길로 나를 올려 보다가

비라도 온다면

항 바닥에 떨어져 쌓였던 귤꽃도

송홧가루도 개구리 알마저 가득 떠올라

궂은비에 다 젖는다는 어머니의 물항라 치마저고리가

둥둥 북소리로 가득 떠올라

하늘도 담고 달도 담고 내 그리움도 다 담아 놓고

물항아 너는 또 어느 돌가마터에서 뜨겁게 구워지고 있느냐

 

▲ 유창훈 作 구억리 노랑굴.

구억리 마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돌가마터와 4·28평화 회담 장소였던 옛날 구억국민학교 터이다. 어렵사리 찾아간 난장팀의 발길이 먼저 닿은 곳은 노랑굴이었다. 구불구불 이어진 마을 안길과 새로 생긴 윗길들의 적요로움과 시끄러움이 울타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른 세계 안에 놓여있다. 새 소리, 바람 소리, 울담을 감싼 담쟁이넝쿨과 철쭉이 아무렇게나 자라나 노랑굴은 초입부터 흙냄새가 번지는 듯하다. 제주에서 생산되는 옹기는 유약을 칠하지 않아 표면이 거친 게 특징이다. 오로지 불의 힘으로 흙이 가진 색 그대로 자연발색이 되도록 한다.

 

굴은 가마를 뜻하는 제주 방언으로 노랑굴은 그릇을 구울 때 그릇 표면이 노란색을 띠어서 붙은 명칭이다.

 

노랑굴에서 200여m 떨어진 곳에 검은 굴이 있는데 이곳은 800℃ 정도에서 그릇이 구워지다가 산화되는 과정에서 앞뒤 구멍을 모두 차단하여 그릇에 연기가 스며들게 하는 연기 먹이기 방식을 써서 검은색으로 구워져 나온다.

 

그릇을 구워내는 가마는 세계 어느 곳에서 찾을 수 없는 순수하게 자연적인 돌로 만들어졌다.

 

▲ 위에 첫번째 사진은 이동선씨의 시 낭송 모습, 두번째 사진은 고영춘씨의 시 낭송 모습, 아래서 첫번째 사진은 바람난장에서 문상필 교사가 태평소 연주하는 모습, 두번째 사진은 허은숙 제주옹기 박물관장이 노랑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나왔던 것들은 시루, 물항 자라병, 기름병, 허벅, 망대기, 단지, 고소리 등 생활에 꼭 필요한 것들로 쓰임새마다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곳 구억리에서 옹기를 구워낼 수 있었던 이유는 흙이 풍부하고 물이 좋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영어교육도시로 공사가 한창이지만 한때 이 지역이 곶자왈 이어서 땔감 조달이 쉬웠고 더욱이 자갈이 많아 농사가 잘 안되는 지역이어서 주민들이 옹기를 구워 팔아야 곡식을 살 수 있는 어려운 여건도 한몫했기 때문이다.

 

노랑굴은 세월에 의해 무너지는 걸 보호하느라 닫집을 지어 놓았는데 우리를 안내 했던 허은숙 제주옹기 박물관장님은 오히려 자연에서 비바람 맞고 풀이 자라는 그대로 놓아두었으면 원형유지에 더 좋았을 가마를 닫집으로 인해 빨리 허물어지는 듯해서 안타깝다는 걱정 묻은 소견을 내놓는다. 그럼에도 지역에 형성된 새로운 문화의 관점으로 제주옹기를 바라보는 시각들이 있어서 다행이라 한다. 옹기를 굽는 일은 한 해 농사를 짓는 거나 마찬가지여서 굴할망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그게 ‘굴제’이다. 좋은 옹기의 탄생을 빌고 음식을 나눠 먹으며 마을의 화합도 이루지 않았을까 싶다.

 

난장팀은 이곳에서 굴제를 지내는 마음으로 판을 펼쳤다.

 

이동선, 고영춘 님이 강애심 시인의 구억리 가마터와 오승철 시인의 돌가마터 낭송을 시작으로 제주여상 교사로 계시는 문상필님이 굴과 상통하는 것 같아 골라 들었다는 악기 ‘소금’으로 듣는 ‘한오백년’과 ‘태평소’로 듣는 ‘가을밤’까지 듣고 나니 터져 나오는 박수 소리가 굴제 날의 왁자한 축제장이 눈에 보이는 듯 아슴하다.

 

다음에 우리가 발길을 옮긴 곳이 4·28 평화 회담 장소인 옛 구억 국민 학교 터이다.

 

제주 4·3 사건은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를 시작으로 1957년 4월 2일 까지 만 9년에 걸쳐 전개됐다. 실제적으로는 1948년과 1949년 봄까지 사건이 집중되어 있다.

 

4·3사건 당시 민중무장대와 경찰 간의 충돌이 격화되자 양측에서 사태의 평화적 해결방안을 모색하느라 인민유격대 사령관 김달삼과 제주도 주둔 국방경비대 제9연대 연대장 김익렬 사이에 평화 회담이 열린 곳이다. 이 회담에서 동족 간의 유혈 충돌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평화적 수습에 합의하고 전투 행위를 중단했다. 사건 발생 25일 만에 제주도 전역에서 일시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사흘 뒤인 5월 1일 우익청년단원들에 의해 ‘오라리 방화사건’ 이 터지면서 상대방 때문에 합의가 깨졌다는 비난 성명에 뒤이어 경찰과 유격대의 충돌로 제주도는 다시 살인과 방화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69년 전 그날 그 평화회담이 있었던 자리에 다시 섰지만 옛터는 흔적도 없고 위치조차 가늠하기 어려웠다.

 

▲ 바람난장 가족들의 모습.

돌아보면 제주 구석구석 어느 한 곳 가슴이 서늘해지고 울분이 쌓이지 않는 곳이 없다.

 

너무 많이 아프면 고통도 침묵하게 된다. 그러니 제주 바람이 왜 드센지 더 이상 묻지 마라.

 

 

글=강영란

해설=허은숙 제주옹기 박물관장

그림=유창훈

사진=허영숙

음악·감독=이상철

태평소=문상필 제주여상 교사

시낭송=이동선(구억리 가마터)·고영춘(돌가마터)

4·28 평화회담 해설=한림화

 

※다음 바람난장은 13일 난산리 김순이 시인 댁에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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