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제력 관계가 있는 석관묘. 제주시 애월읍 소길리 소재. 고려말 조선초 추정.

▲유교식 장법의 정착과정
그렇다면 조선 초기에 도입된 유교의 장법이 왜 민간에서는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겉으로 보면 부모를 위한 효도를 하는 것을 마다할 사람이 없다. 처음 유교식 상장제도를 도입한 사람들은 모두가 경제력이 있는 관료이거나 지방 토호들이었다. 초기 유교 제도의 도입이 퍼지지 않는 것 중 가장 중요한 요인이 제주인의 빈곤이 문제였다.

 

생산력이 낮았던 섬에서 각종 부세에 시달리며 노동력의 착취로 인해 시간을 뺏기는 일반인에게 유교식 장법은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육지인들이나 경제적 기반이 있는 토호들의 눈엔 왜 제주인이 아름다운 유교의 풍속을 지키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부리는 자의 생각으로는 부림을 당하는 자의 고통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옛 기록을 보면 종종 그런 육지인들의 시각이 발견된다. 유배인 충암 김정(金淨·1486~1521)은 제주(濟州)의 풍속을 변화시킨 사람으로 회자된다. “김정(金淨)이 제주에 귀양을 갔는데 이곳은 풍속이 음사(淫祀)를 숭상하고 예제(禮制)에 몽매하였다. 그래서 김정이 상사(喪事)와 장례(葬禮) 및 제사 등에 관한 의문(儀文)을 지어서 시골의 백성들을 인도하자 풍속이 크게 바뀌게 되었다”는 식이다.

  
기건(奇虔·? ~ 1460)의 호는 청파(靑坡로 세종 때 제주목사를 지냈고 요직을 두루 거쳐 세인에게 칭송을 받는 인물이다. 전게(前揭)한 기건 목사의 이야기는 ‘월사집(月沙集)’, ‘연려실기술(燃黎室記述)’,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탐라지(耽羅誌)’, ‘목민심서(牧民心書)’, ‘임하필기(林下筆記)’외에도 ‘탐라기년(耽羅紀年)’ 등에 실려서 조금씩 변형되어 전해오고 있다.


일본 총독부 촉탁 학자 무라야마 지쥰(村山智順) 또한 ‘증보문헌비고’에 실린 기건의 이야기를 들어 학장(壑葬)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학장(壑葬)은 류큐(琉球)남도에 비교적 최근까지 행해지고 있었던 암굴장과 매우 비슷한 풍속이라고 말하면서, 기건의 이야기 가운데 ‘제주의 옛 풍속이 부모의 시체를 매장하지 않고 계곡 암굴 안에 방치하는 장법(濟州舊俗 不葬其親 死輒委之壑)을 쓴다’ 는 문구에 주의한다. 그러나 무라야마 지쥰(村山智順)도 “이 한 예만으로 단순히 제주도민 사이에서 이 장례풍습이 행해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없지만 도서 및 해안 등의 지역에서 이런 장례법을 행하지 않았나 상상된다”고 추측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 무라야마 지쥰(村山智順)의 말처럼 조선의 벽지(僻地)에서는 음으로 양으로 유교식 매장이 아닌 초장(草葬)을 치렀다는 기록이 등장하는데 1680년 제주어사로 왔던 이증(李增, 1628~1686)의 ‘南?日錄’에도 그 흔적이 보인다. “이증(李增)이 듣건데 “정의(旌義)사람이 근년에 육지에 나갔다가 죽어서 해변에 초장(草葬)하였다가, 지난해 정월에 그의 아들이 시체를 운구(運柩)하러 육지에 나가서 바다 가운데서 표몰하면서도 그 시체를 배에 싣고 오는데 이 배에 탄 사람들 모두가 이 배에 시체를 태웠기 때문에 바람에 표류하게 되었다고 허물하므로 그 시체를 들어다 바다 가운데 던져버렸다고 한다. 참혹하고 불쌍함을 견딜 수가 없다”


▲한센병 환자를 치료한 기건
여러 정황에 의하면, 기건 목사의 이야기는 사실 고대 장법의 한 유형인 학장(壑葬)을 바로 지칭하는 것 같지는 않다. ‘세종실록(世宗實錄)’ 27년(1455) 11월 6일의 기록에는 ‘제주에 한센병이 유행하여 그 병에 걸린 자가 있으면 전염되는 것을 우려하여 해변(海邊)의 사람이 없는 곳에 두므로,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암애(岩崖)에서 떨어져 목숨을 끊으니 기건이 불쌍하여 스님으로 하여금 뼈를 거두어 묻게 하고, 삼읍(三邑)에 치병소(治病所)를 두어 이에 치료에 힘썼다’는 기록을 볼 때 한센병의 전염을 두려워한 제주민들이 한센병 환자들의 시신을 거두지 못하고 그대로 방치된 것을 보고, 마치 그 당시 제주의 장례 풍습이 고려장의 모습처럼 학장(壑葬)인 것으로 기건의 기록이 오해된 듯하다.


원래 학장(壑葬)은 고대의 장법인데 ‘묵자(墨子)-절장편(節葬篇)’에는 ‘시신을 들에 내다버려 썩기를 기다렸다가 그 뼈를 묻는’ 이차장(二次葬)의 풍속이 전해온다. ‘맹자(孟子)-등문공 상편(?文公 上篇)’에는 부모가 죽자 골짜기에 내다버렸는데 짐승이 시신을 훼손하는 것을 보다 참다못해 삼태기와 나무삽을 가져와 흙으로 시신을 매장하였고, 그 후에 장법을 매장하는 방법으로 고쳤다고 한다. 소전(小篆)의 ‘壑’자는 한 손·한 개의 뼈, 그리고 골짜기 세 부분이 합성되어 만들어졌다. 이 글자의 창제 의미는 야수에 의하여 깨끗하게 갉아 먹힌 백골을 손으로 주워 모으는 곳이 골짜기라는 것이다. 깊은 골짜기는 사람이 자주 다니지 않으므로 시체를 버리기에 좋은 장소이다.

 

   
▲ 사진은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의 한 장면으로 고려장이라고 불리는 학장의 풍속을 그렸다.

사람들이 골짜기에 가는 것은 뼈를 주워 모으러 가는 것이므로 그런 의미로 글자를 만들었다. 초기에는 손으로 뼈를 주워 모은다는 것만으로도 깊은 골짜기라는 의미를 표현할 수 있었으나, 뒤에 오면서 골짜기를 의미하는 ‘谷’을 덧붙여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만들었다.


▲문화투쟁, 뱀과 유교이데올로기
실은 제주도가 생산력이 낮은 돌섬이라는 특징 때문에 관을 마련하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은 옷을 입은 채 땅을 조금 파서 시신을 가리는 정도의 매장법을 적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난한 제주 사람들의 장법이 고려장으로 보일 수도 있는 대목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극도의 가난을 만나면 과연 예의를 얼마만큼 차릴 수 있을까.  


목사 기건과 관련된 전설에, ‘나이 70세가 되면 맛있는 음식을 차리고 한라산에 올라가 어버이를 두고 오면, 그날로 신선이 돼 하늘로 올라간다는 말을 들은 기건은, 마침 내일 한라산으로 어버이를 지고 갈 자신의 부하인 이방에게 옥황상제한테 전하는 편지를 써 주면서  아버지의 가슴에 잘 간직하도록 했다.

 

그 후 기건은 한라산을 다녀온 이방과 함께 아버지가 신선이 돼 올라갔는지 알아보기 위해 한라산 고려장터에 가보니 아버지는 없고 큰 뱀 한 마리가 죽어있었다. 그 뱀의 배를 갈라보니 아버지가 고스란히 죽어 있었다. 기건이 편지에 독약을 넣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제주에서는 70세가 되면 어버이를 한라산에 버리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이 설화는 목사 기건을 내세워 뱀신앙이 있는 제주인을 유교식으로 교화하는 이데올로기 투쟁의 면모를 보여준다. 즉, 서린의 김녕굴의 뱀 퇴치, 이형상의 신당 파괴 이야기 등은 예제로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한 문화투쟁의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