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을나(高乙那)의 딸

 

문득 면전(面前)에 우슴소리 있기에

취안(醉眼)을 들어보니, 거긔

오색 산호채(珊瑚彩)에 묻혀있는 낭자(娘子)

 

물에서 나옵니까.

 

머리카락이라든지 콧구멍이라든지 콧구멍이라든지

바다에 떠 보이면 아름다우렸다.

 

석벽(石壁) 야성(野性)의 석류꽃 열매 알알

입설이…… 잇발이 저……

 

낭자의 이름을 무에라고 부릅니까.

 

그늘이기에 손목을 잡었드니

몰라요. 몰라요. 몰라요. 몰라요.

눈이 항만하야 언덕으로 뛰어가며

혼자면 보리누름 노래 불러 사라진다.

 

-서정주의 ‘고을나(高乙那)의 딸’ 전문

 

   
▲ 홍진숙 作 지귀도에서.

누구의 ‘일생일획’ 같은 지귀도가 예술혼으로 꿈틀댄다.

 

 

지귀도(地歸島), 남원읍 위미리 산146번지.

 

나에겐 어머니의 숨비소리가 아직도 갈매기 울음소리로 부서지는 곳이다.

 

예촌망이나 공천포, 아니면 자배봉에서 바라보면 누군가가 바다 한가운데 그어놓은 ‘일생일획(一生一劃)’이 예술혼으로 꿈틀대는 것 같다.

 

‘바람 난장’이 펼쳐진 5월 마지막 토요일은 남청색 바다와 검붉은 갯바위가 만나 추억의 하얀 포말을 흩날리고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 그러니까 1960년대 중반 해녀였던 어머니를 따라 발동선으로 지꾸섬(위미에선 지귀도를 그렇게 불렀다)을 종종 찾아갔었다.

 

   
▲ 최옥주 제주시낭송협회 회원이 서정주 시인의 ‘고을 나의 딸’을 낭독하고 있다.

해녀들이 물질을 하는 동안 혼자 ‘고망낚시’를 하며 온몸을 깜부기처럼 태우곤 했었다.

 

지귀도에서 바라보면 제주가 한라산 하나로 형성된 섬이자, 산임을 선명히 확인할 수 있다.

 

원래 지귀도는 유인도였다.

 

10여 가구가 농사도 짓고 어업활동을 했었지만, <4·3>의 여파와 농지 소유주가 바뀌는 등의 일련의 과정으로 무인도가 돼 버린 것이다.

 

   
▲ 김옥자 회원이 서정주 시인의 ‘제주도의 한 여름’을 낭독하는 모습.

내가 처음 찾아갔을 때에는 무너진 초가의 흔적, 즉 ‘터무니’를 볼 수 있었다.

 

어쨌거나 1937년 초여름, 청년 서정주가 지귀도를 찾았을 때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거기에 고씨의 딸도 있었고, 때는 보리누름 철이었던 것이다.

 

한기팔 시인은 “대학 시절 미당 선생의 제자로 지귀도에 대한 얘기를 직접 들었다”며 “미당 선생은 지귀도에서 6개월 동안 머물며 ‘고을나의 딸’, ‘웅계’, ‘제주도의 한여름’ 등 10여 편의 시를 남겼는데, 그의 첫 번째 시집 『화사집(花蛇集)』 과 두 번째 시집 『귀촉도』 등에 분산, 수록되어 초기 시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문학사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고 했다. 특히 고을나의 딸은 눈이 항아리만 해지는 제주여성의 순박성과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청년의 이성적인 충동감을 실감 있게 그려낸 것이라고 덧붙였다.

 

   
▲ 스물 두 번째 바람난장이 지귀도에서 진행됐다. 사진은 고성옥 명창의 공연 모습.

80년 전 미당의 그 시선으로 시 낭송가 최옥주씨가 ‘고을나의 딸’, 김옥자씨가 ‘제주도의 한여름’을 파도 소리 배경음악 삼아 낭송하는 동안 고씨 딸에 반한 청년 미당의 수작이 천진난만하게 펼쳐졌다.

 

‘오돌또기’ 한 곡조만 부르겠다며 마이크를 잡은 고성옥 명창은 섬이 좋고 물빛이 좋고 사람들이 너무 좋아 ‘느영나영’을 비롯한 여러 곡을 불렀고,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합창으로 이어졌다.

 

   
▲ 바람난장 가족의 모습.

마침 그곳에서 우리는 지인을 만나 갓 낚아 올린 싱싱한 뱅에돔 회를 실컷 맛볼 수 있었다.

 

지귀도를 다시 그 자리에 놓아주고 돌아오면서 ‘그때 그 고을나의 딸은 어디로 시집을 갔을까?’라는 괜한 생각에 피식 웃었다.

 

글=오승철

그림=홍진숙

노래=고성옥

사진=허영숙

시 낭송=최옥주·김옥자

 

 

※다음 바람난장은 제주청소년오케스트라 합주 연습공간에서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