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만고궁박물관에 있는 기황후(왼쪽)와 원나라 황제인 순제의 초상화.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간 고려 여인 기씨(奇氏).

황궁에서 일하던 기씨는 황제인 순제(1333~1370)의 차 시중을 들면서 총애를 얻어 후궁이 됐다.

황후 다나슈리는 채찍으로 기씨를 매질하고 인두로 지질 정도로 질투가 심했으나 기씨는 좌절하지 않았다.

고려 여성이라는 이유로 온갖 차별과 모멸을 감내한 기씨는 드디어 기황후(奇皇后·1315~1369)에 올랐다.

독실한 불자인 그녀는 북두칠성의 명맥이 비치는 삼첩칠봉(三疊七峰·3개의 능선과 7개의 봉우리)에 탑을 세워 불공을 드려야 한다는 승려의 계시를 믿었다.

사신을 보내 제주시 삼양동 원당봉 중턱에 불탑사(고려시대 원당사)를 짓고 오층석탑을 건립했다.

이 같은 노력에 기황후는 1339년 태자 아유시리다라를 낳았다.

이 후 이곳은 아들을 원하는 여인들의 성지가 됐다. 오층석탑은 제주 유일의 현존하는 고려시대 석탑으로 보물 1187호로 지정됐다.

각 층은 탑신과 옥개(지붕)를 하나의 돌(현무암)으로 조성했다. 높이는 4m로 5층의 탑신까지 급격히 좁아지는 비율로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탑신에는 문양을 넣지 않아 단순함이 돋보이며 네 귀퉁이 처마는 살짝 들어 올려 의연하게 서 있다.

주지스님에 따르면 10여 년 전 실측조사 시 탑 몸돌에 사리공이 발견됐으나 석탑의 기원과 내력을 알 수 있는 유물은 도굴됐다.

기황후는 태자를 낳으면서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를 호령했던 대제국 원나라의 실권 황후로 등극했다.

 

   
▲ 기황후가 태자를 얻기 위해 건립한 불탑사 오층석탑. 이 탑이 있는 제주시 삼양동 원당봉은 삼첩칠봉을 갖춘 명당으로 꼽히고 있다.

기황후로 인해 원나라에는 고려의 풍속과 복식, 음식이 대유행했다. 이를 고려양(高麗樣)이라고 하는데 기황후는 한류 바람을 일으킨 최초의 주인공이나 다름없었다.

1368년 주원장이 이끄는 명나라 대군이 원나라 수도를 점령하면서 황실은 피난길에 올랐다. 피난 중에 순제는 죽고 그 자리를 기황후의 아들의 이어받아 북원의 황제 소종이 됐다.

기황후는 내몽골 자치구에 있는 응창부(應昌府)로 피난을 갔다가 포로가 돼 1369년 운명을 달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황후에 대한 사후 평가는 엇갈린다. 고려를 원나라의 한 지방으로 만들자는 소위 입성론(立省論)을 적극 막았고, 노예나 다름없던 공녀 송출을 중단시킨 것도 그녀의 업적이다.

당시 고려는 30여 년간 원나라의 침략에 맞서 항쟁하다 항복하면서 사실상 원나라의 속국이 됐다. 그녀가 황후에 오르면서 오빠 기철은 대표적인 권문세족이 됐다.

기철과 친원파는 고려의 국정을 농단하고 전횡을 일삼았다. 이에 공민왕은 원의 영향력이 약해진 1356년 기철 일족을 비롯해 친원파를 대대적으로 제거했다.

집안의 멸족 소식을 접한 기항후는 원나라 군사 1만명을 보내 고려 정벌을 명했다. 이들은 평안도 지방까지 진출했으나 최영·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에 대패했다.

노비나 다름없던 공녀로 끌려가 대제국의 황후에 오른 기황후의 영광과 몰락은 불탑사 오층석탑에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