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밭에 조성된 묘지, 제주지역은 경제적 여건 때문에 관(棺)을 마련하지 못해 밭머리에 땅을 파서 시신을 매장하는 장법을 이용했다.

▲혼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헛묘
앞서 인용한 조정철의 글을 보면, 이수광이나 김상헌이 활동했던 시대로부터 약 200년이나 지난 조선 말기까지도 남소여다(男少女多)의 사회적 여건은 별반 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오백 절오백’이라는 말은 제주의 융성했던 종교·신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원래 ‘당오백 절오백’이라는 말은 제주도 신화 중 ‘천지왕본풀이’에 보면, “이 산 앞도 당오백 저 산 앞도 절오백 오백장군 오백신선”에 근거하는 말로 본향당과 절간이 그만큼 많고 융성했다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 오늘날도 여전히 그 전통이 남아있는 제주 여성의 신앙 형태는 무속(당)과 불교(절간)를 동시에 수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불교식이거나 무속식이거나 한때 융성했었을 제주의 상장제례(喪葬祭禮) 문화는 여러 형식을 달리하면서 일시에 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근거를 찾을 수 있는 문헌이 없어 사실적인 접근이 어렵다. 무속의 본풀이에 전해오는 구전(口傳) 또한 유교식 상?장례와 비슷하기 때문에 독자적인 무속의 장례법을 알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저승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차사본풀이’에는 “초수렴(殮襲)도 헌다 (……) 제광(開鑛)하기 상개판(上蓋版), 중개판, 하개판 덕으기(덮기를) 서립허고(세우고) 용묘제절(龍墓除節) 섭섭허다.” 리는 말이 있고, 또 제주 무덤 의례와 관련해서는 출빈(出殯)에 대한 이야기도 비친다. 「초공본풀이」에 “앞 밭디 출병눌을 헛뜨리고 보니 헛출병이로구나” 하여 제주 토롱의 풍속을 말하고 있다. 출병(출빈(出殯)의 와음:필자주)이란 정식 매장이 아니라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임시로 가매장 하는 것을 말하는데 헛출병이란 헛묘를 조성한 것을 말한다. 제주도에서는 이와 같이 가매장 방법으로 토롱을 선호했으며, 시신을 찾지 못한 경우 헛묘를 만들거나 비석을 세워 언제라도 혼이 고향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밭머리에 무덤을 만든다

현존하는 기록들이 대개 조선조 정사(正史)이거나 유학자들의 저술만 전해오는 관계로, 조선 중기까지 전해오던 고려시대 제주 무덤 풍속에 대한 사실적인 증명은 그야말로 가설이나 추론에 맡길 수밖에 없게 되었다.


1530년 중종 때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제주목(濟州牧)’조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밭머리에 무덤을 만든다(田頭起墳)-상을 치르고(治喪) 백일(百日)이면 상복(喪服)을 벗고 밭머리를 조금 파고 무덤을 만든다. 간혹 삼년상을 행하는 자도 있다. 풍속이 지리 풍수(地理風水)와 복서(卜筮)를 쓰지 않고 또 부처의 법도 따르지 않는다.’


미수 허목(許穆·1595~1682)의 ‘미수기언-탁라’조에 ‘사람이 죽으면 밭 사이에 묻었고, 부처의 법을 섬기지 않았다(人死則葬之田間 不事浮屠)’ 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17세기까지도 제주 장법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652년(효종 3년) 경 제주목사 이원진(李元鎭)과 제주 출신 전적(典籍) 고홍진(高弘進)이 목판본으로 편찬한 ‘탐라지(耽羅志)’의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지지(地誌)내용과도 일치한다. 아마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참고한 까닭일 것이다. ‘전두기분(田頭起墳) 밭머리에 무덤을 만든다-치상(治喪)하고 백일에 대략 상례를 마치고 밭머리를 조금 파서 무덤을 일으킨다. 간혹 3년 상을 행하는 사람도 있는데 풍속에 지리복서(地理卜筮)를 사용하지 않고 또한 부도법(浮屠法)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 마소들이 활동하는 들녘에 조성된 묘지와 산담.

▲장례문화의 변화
그러나, 조선 숙종 때 제주 목사로 부임하여 불사(佛寺)와 신당(神堂) 파괴를 주도했던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 1653~1733)의 ‘남환박물(南宦博物)’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 간행된 지 170여 년이나 지난 뒤라 그런지 제주도 장례 풍속이 확연히 다르다. 밭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장소에서 벗어나 이제는 들녘 어디에나 무덤 자리가 되고 있고 삼년상이 민간에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두기분(田頭起墳)-地誌에 의하면, 치상(治喪)하고 백일에 대략 상례를 마치고 밭머리를 조금 파서 무덤을 일으킨다. 간혹 3년 상을 행하는 사람도 있는데 풍속에 지리복서(地理卜筮)를 사용하지 않고 또한 부도법(浮屠法)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삼년상을 사람마다 모두 이를 행하고 있는데 지리복서(地理卜筮)를 혹 사용하는 사람은 업중(業中)으로써 추포 2필씩 징출(徵出)하여, 상평청(常平廳)에 회록(會錄)하는데 이른바 業中이라 한다. 대개 지술(地術)을 가리키는데 이는 반드시 탐라의 옛 관례이다. 그리고 밭머리에 분묘를 일으키는 것은 오히려 옛일이다.’


지금까지 기록들을 정리하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 간행된 16세기에는 100일에 탈상(百日脫喪)하였고 삼년상을 치르는 자는 그야말로 만에 하나이며 풍수지리(地術)를 부리지도 않고 화장(火葬)도 행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아마도 제주에서는 16세기 중반까지도 유교식 상·장례 문화가 보편화되지 않은 듯하다. 그 시기에도 여전히 고려시대 장례 습속이나 탐라 고유의 장법이 남아 있었고, 또한 경제적인 여건이 미치지 않아 관(棺)을 마련할 수 없기 때문에 ‘밭머리를 조금 파서(略掘田頭)’시신을 묻는 장법이 세간에 공공연하게 이용된 것 같다.


그러나 정작 18세기가 되면 이와는 정반대의 상황으로 탈바꿈하여 유교식 장례문화가 완전히 제주에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변화는 조선 정부가 통치의 목적으로 수령권을 강화하고 유교의 중앙집권체제를 확고히 다지기 위해 책판의 보급에 힘쓴 결과였다. 즉 유교의 이념을 적극적으로 유포했던 것이다.


이미 주자(朱子) ‘가례(家禮)’는 15세기에 전국적으로 보급되었고, 18세기가 되면 그것의 해설서 겸 고증서로써 알기 쉽게 실제 의례 과정에서 부딪치는 어려움을 문답식으로 구성한 책판들이 제주에 유입되었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상례비요(喪禮備要)’나 ‘언해상례비요(諺解喪禮備要)’, ‘언해의례문답(諺解儀禮問答)’을 판각하여 서책으로 만들어 보급한 것이 그것이다.


18세기가 되면 사람마다 ‘3년 상을 모두 행하고’ 소위 지관(地官)은 상평청(常平廳)에 올 굵은 삼베 두 필의 세금을 내고는 ‘풍수지리(地術)’를 부리고 다녔다. 이제 분묘를 일으키는 곳이 밭머리가 아니라, 명당이라면 어느 산야(山野)라도 마다하지 않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