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에 밀려난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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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읍내에 집 짓고 살며 마음 쏠렸던 게 울타리 너머 덤불숲이었다. 운치는 없어도 수많은 식생들이 깃들였으니, 자연을 바투 끼고 살아온 셈이다. 요즘 이런 자연 친화적 주거란 게 어디 쉬운가. 돈 갖고 새집을 짓는다 해도 이만한 환경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한데 이 탐스럽던 구도가 삽시에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동남쪽 울에 바짝 들이대어 대규모 주택단지가 들어서고 있는 게 아닌가. 4층에서 7층까지 여러 동으로 수영장도 갖춘다 한다. 중장비가 들어와 며칠 휘젓더니 순식간에 숲이 사라져 버렸다. 이어지는 깨고 때리고 박고 두드리는 소리와 풀풀 날리는 먼지. 참 곤혹스럽다.

더욱이 철재 부딪치는 쇳소리는 자극적이라 견디기 힘들다. 거대한 장비들의 출몰을 지켜보며, 이도 다 연(緣)인가 해 가슴을 쓸어내리곤 한다. 땅 주인이 제 땅에 집을 짓는데 뭐라 할 것인가. 눈 딱 감고 공기(工期)가 끝나기만 기다리는 중이다. 지난가을 시작한 공사가 여름을 넘길 것인데, 문을 닫고 사는 데도 한도가 있다. 이런 막무가내한 일이라니. 하지만 하릴없이 도인 연(然)해 견뎌 내는 수밖에….

느닷없이 쳐들어온 점령군에게 쫓겨, 오던 새도 오지 않으니 벌써부터 가슴 아리다. 울안의 나무며 꽃도 이 좋은 시절을 반납한 채 온몸에 먼지를 둘러쓰고 추레한 행색들이다.

숲과 함께 수많은 생명들이 눈앞에서 매몰돼 갔다. 거대한 장비에 아늑하던 전원이 파괴됐으니, 동네 분위기는 이미 읍내 마을이 아니다. 지금 진행 중인 거대한 시멘트 구조물의 축조, 그 뒤 도시의 한 축으로 들어설 낯선 아파트와의 서먹한 공존이 낯설겠지만, 그보다 더한 게 있다. 그게 가져올 부조화와 불화(不和).

문명이 밀려난 자리는 공허하다.

아동문학가 K로부터 동시집 발문을 의뢰 받아, 며칠 끙끙거리며 초고한 뒤 파일에 저장해 놓고 몇 번 퇴고했다. 저자에게 송고하려 새벽같이 마무리를 하는 중이었다. 오자 하나 바로잡으려 했을까. 모음을 치는 오른손 끝으로 경미한 촉감이 왔을 뿐인데, 밀어 올려도 화면이 움직이질 않는 게 아닌가. 기를 쓰고 내려뜨리려 해도 옴짝달싹하지 않는다.

‘어, 이상하네.’ 그래도 단단히 믿는 구석은 있었다. ‘삭제’한 적이 없지 않은가. 오르지도 내리지도 않자 가슴이 쇳덩이 가 돼 갔다. ‘뭐가 잘못됐나 보다. 이걸 어째.’ 인근의 수필가 Y를 찾고, 큰아들을 불렀지만 문서는 끝내 종적을 감춰 버리고 말았다.

없다는 것이다. 아니, 지우지 않았는데 도대체 왜 없다는 소린가. 하여간 없다는 것이다. 일주일 넘게 매달렸던, 장장 A4 열한 장의 발문 원고.

눈앞으로 안개 기운이 오더니 정신이 흐리멍덩하다. 그만 기(氣)가 막혔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헛말만 되풀이했다. 무엇이 잘못되려면 신호가 오질 않나. 삐걱거리거나 작은 파열음을 내거나. 세상에 이런 일이….

멘붕, 주체할 수 없는 정신의 공황이 왔다. 다시 쓰라고? 썼던 낱말 하나도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은데 어떻게 쓸 것인가. 이틀 동안 마당을 서성이고 옥상에 올라 산을 등지고 바다를 굽어보며 맴돌았다. 손으로 썼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을.

황폐한 텃밭을 괭이로 파고 호미로 매며 다시 발문을 썼다. 갔던 길을 어떻게 도로 갔는지 시종 캄캄했지만, 갔던 길이라 갔을 것이다.

K 작가에게 송고하며 실없이 웃었다. 오작동, 문명에 밀려난 자리는 공허하다. 하지만 그게 굴레인데도 사람들은 문명이라는 질곡에서 자유롭지 않다.

나도 지금, 하릴없이 이 글을 워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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