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극복의 바람, 풍수
만물은 음양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만나 생성되는 것이며 천기(天氣)와  지기(地氣)가 서로 통하는데, 사람이 살 수 있고, 또 조상의 시신을 모실 수 있는 곳은 음(산)과 양(물)이 서로 부합된 곳이라야 한다. 하여 풍수란 풍수지리의 약어(略語)로 이런 음택과 양택의 길지(吉地)를 찾는 땅의 원리를 논한 것이다. 오늘날도 풍수지리는 우리의 생활 속에 살아 숨 쉬는 데 특히 음택풍수는 조상과 자손이 동기감응(同氣感應)하여 집안이 발복(發福)한다는 믿음을 주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민간에 성행하게 되었다.

 

제주도는 한라산을 중심으로 길지, 즉 명당이 존재한다고 하는데, 이 명당에 장례를 지내게 되면 자손대대로 부귀영화의 은덕을 입는다는 것이다. ‘영주영도초(瀛州影圖草)’, ‘제주도산록(濟州島山錄)’은 한라산을 중심으로 제주 전도의 명당에 관해 풍수를 논한 책들이다. 풍수의 성행은 곧 쓰라린 제주섬의 역사를 반영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닌데 당오백 절오백의 신앙, 초상(조상신)에 대한 숭배, 전해오는 제주도 풍수 설화의 성공과 실패담은 힘겨운 제주도 사람들의 현실을 이겨내기 위한 유토피아적 지향이 아닐 수 없다.


▲풍수설에 대한 비판
선학들은 풍수지리를 신뢰하지 않았는데 조선의 실학자들은 풍수지리 술법을 비판하기 이전부터 경계했다. 김시습(金時習·1435년~1493년, 호는 매월당(梅月堂), 또는 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이다)이 말하기를, “어버이가 돌아가셨을 때 그 택조(宅兆)를 가려서 장사를 지내는 것은 풍수에 구애되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대저 편안히 지낼 곳을 가리려는 때문이다. 그리하여 첫째 토질(土質)이 두터운 곳을 가리고, 둘째 물이 깊은 곳을 가리며, 셋째 소나무와 가래나무 등을 심어서 잘 자랄 수 있어야 하고, 넷째 시대가 바뀌어도 개간을 할 수 없어야 하며, 다섯째 거리가 가까워서 때맞추어 제전(祭奠)을 올릴 수 있어야 하는데, 이 다섯 가지가 갖추어진 뒤에야 편안하게 장례를 모실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비록 이미 돌아가셨다고 하더라도 구천(九泉)에서 편안히 지낼 수 있도록 해 드리려는 효자의 마음이며, 또한 자애로움을 잊지 못하는 효자의 깊은 뜻이다.” 라고 했다.


이항복(李恒福·1556~1618,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백사(白沙)이 말하기를, “내가 약관(弱冠) 시절에 산가(山家:풍수가)의 설을 지극히 좋아하여 널리 이에 관한 글을 수집해서 남김없이 모두 독파하였다. 그래서 그것이 낭설이라는 것을 꿰뚫어 알았기 때문에 마침내 이것을 버리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대개 그 설로 말하자면 이는 단지 빈주(賓主) 사이에 공읍(拱揖)하는 형세와 현무(玄武)·주작(朱雀)·청룡(靑龍)·백호(白虎)들의 모양에 불과한 것으로, 여기에다 취산(聚散)·이합(離合)·융결융해(融結融解)와 응결(凝結)·관쇄(關鎖)·관애(關隘)와 쇄약(鎖?) 등의 방법을 참작한 것이라 하겠는데, 요점만 말한다면, 다만 그것이 유정(有情)이냐 무정(無情)이냐 하는 것에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팔괘(八卦)와 간지(干支)의 배향(背向)과 순역(順逆)의 설로 말하면, 이는 더욱 후세에 만들어진 부실한 말이다.

 

   
▲ 명당을 찾아 깊은 산중에 조성한 무덤.

선유(先儒)들이 토색(土色)이 환하게 윤기가 나고 초목(草木)이 무성하면 훌륭한 땅이라고 말한 것이야말로 참으로 만세(萬世)의 전모(典謨)로 삼을 만한 것이라고 하겠다. 사마광(司馬光)과 나대경(羅大經)은 송(宋)나라의 명유(名儒)이다. 나대경이 말하기를, ‘이른바 묘지(墓地)를 정밀하게 택한다고 하는 것은 단지 산과 물이 회돌아서 합하고 풀과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서 어버이의 유체(遺體)로 하여금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하고자 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였다.” 


또 이순명(李順命·1474년 식년시 병과 급제)도 다음과 같이 풍수설에 대해 비판했다. “곽박(郭璞)이 ‘장경(葬經)’을 짓게 되자 이로부터 점점 더 성행하였다. 근세에 이르러서는 인가(人家)의 화복(禍福)과 수요(壽夭)를 오로지 장지(葬地)에다 돌리고 있으니, 만약 그렇다면 이른바 천명(天命)이라고 하는 것이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가 없으며 권선징악의 이치 또한 하늘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하겠는 바, 위복(威福)의 권능(權能)이 전적으로 땅에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하겠으니 이것이 어찌 이치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 만물이 모두 함께 땅으로 돌아가는데 그 땅이 어떻게 좋고 나쁜 차이가 있을 수 있겠는가. 옛날 사람들은 장사를 들판에다 지냈지만 그들이 이 때문에 화를 입었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하였다. 그러니 이것은 곧 굽은 것을 바로잡으려다가 도리어 휘어 놓은 주장이라고 해야 하겠다. 선유(先儒)가 어째서 여기에도 온편하고 저기에도 온편한 이치를 말하지 않았겠는가.

 

   
▲ 마을 가까이에 바다를 마주보며 조성된 무덤.

사람이 죽으면 지각(知覺)과 운용(運用)의 기운이 흩어지고 골육(骨肉)과 정혈(精血)의 등속이 썩어 버려 참으로 이 사람들로 하여금 화를 입고 복을 받게 할 수 있는 무엇이 남아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일리(一理)와 일기(一氣)는 일찍이 잠깐 동안이라도 끊긴 적이 없어서 조고(祖考·조상)의 기운이 곧 자손의 기운이 되는 바, 그리하여 조고의 체백(體魄)이 편안하게 되면 단지 살아 있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강녕(康寧)과 수고(壽考)에 대한 복도 보장할 수가 있는데 어찌 이와 같은 이치가 없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풍수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너나없이 집안의 부흥을 위해 묘지풍수에 의존하는 것이 점점 유행하게 되자 지나친 묘지의 치장과 터무니없는 지리술법을 경계하는 실학자들(朴齊家, 李瀷, 鄭尙驥)의 묘지풍수 개혁론이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정상기(鄭尙驥·1678~1752)는 ‘풍수를 금함(禁風水)’에서, “사람의 생사(生死)와 빈부(貧富)·수요(壽夭)와 귀천(貴賤)을 하나같이 풍수에 맡겨버린다.(…)한 지사(지관)의 기리는 말을 듣고 여기에 장사했다가, 또 한 지사의 나무라는 말을 들으면 저기로 옮겨서 장사한다. 한번 옮기고 두 번 옮기기에 이르러도 그만두지 않으니 그 인륜을 해치고 의리에 어긋나서 교화를 해치고 습속을 무너뜨리는 것이 이것보다 심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것은 모두 이치에 밝지 못한 자이다.


백나용 기자 nayong@jeju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