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살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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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언. 전 중등교장/시인

엄마 손을 잡고 집으로 향하는 서너 살 어린이를 가끔 만난다. 머리를 숙이며 더듬는 말씨로 “안녕하세요.”하고 내게 인사를 건넬 때면, 육지에서 살고 있는 손주들과 겹쳐져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다. “안녕, 참 착하고 예쁘네.”하며 도로 인사를 전하면, 아이의 입가엔 미소가 이어지고 엄마의 눈빛은 더욱 밝아진다. 첫 만남의 짧은 인사로도 서로의 마음에 기쁜 파문을 일으킨다.

집 근처에 어린이집이 두 군데 있지만, 대부분 노란 버스를 이용하거나 자가용으로 오간다. 운이 좋아야 길에서 유아들과 마주친다. 일자리를 찾아 도심으로 떠나서일까, 젊은이들 만나기도 쉽지 않다. 굵은 손마디로 경운기를 몰고 가는 주름 파인 얼굴과 탈탈거리는 소리가 애잔한 삶의 풍경을 이룬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다 하거늘, 녹록한 삶이 어디 있을까. 자연은 짙푸른데, 사람들은 너나없이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산아제한을 부르짖은 것이 엊그제 같은데, 옛말이 되고 말았다. 미 중앙정보국 ‘월드팩트북’에 따르면, 지난해 추정치 기준으로 한국의 합계출산율(여성 1명이 평생 낳을 수 있는 평균 자녀 수)은 1.25명이며, 세계 224개국 중 220위다. 사람이 미래라며 출산을 장려하고 있으나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왜 비혼율이 늘고 있을까. 결혼은 의무가 아니라 선택에 불과하다는 삶의 방식이 다양해지는 탓도 있지만, 경제적 문제가 근간일 것이다. 당장 생계를 꾸리는 어려움에서부터, 자녀 양육비나 결혼 비용 등이 큰 부담으로 작용하는 듯하다.

그뿐인가. 통계청 발표를 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우리나라는 2003년부터 2015년까지 13년간 연속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안고 있다. 38분당 1명이 귀중한 생명을 버린다니, 말문이 막힌다. 어떤 경우라도 생을 포기하는 것은 죄악이라는 믿음 때문에, 선뜻 그들 마음 곁으로 다가설 수가 없다.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이라는 말을 접할 때면 슬픔의 너울에서 허우적거린다. 큰 바위가 가슴을 누른다. 이것저것 다 포기하며 견디다, 절망과 분노를 쏟아내는 심정을 어찌 나눌 것인가. 그 비통함을 어찌 삭일 것인가.

아장거리는 두 아들을 남기고 며칠 앓더니 꽃다운 나이를 접어 버린 아내 앞에서 나도 한없이 울었었다. 그때 사람들은 ‘살다 보면 살아진다.’는 말로 나를 위로했다. 그 아이들이 자라서 아버지가 되고, 내가 할아버지가 되었으니 살다 보면 살아지는 것이 인생일 듯싶다.

결핍을 모르는 것은 또 다른 결핍이라고 하지 않는가. 슬픔과 고통의 골짜기를 지나지 않고 어찌 기쁨의 산을 오를 수 있으며, 절망 속에서 몸부림치지 않고 희망의 싹을 틔울 수 있을까. 가난을 겪어 보지 않고 어찌 한 줌 소유의 의미를 알 것이며, 사랑하는 이를 여의지 않고 사람을 꽃보다 아름답게 여길 수 있겠는가.

어느 시인은 몰래 잠깐 바람피우지 말고 ‘진짜 돌이킬 수 없는 사랑을 하려거든/ 한 지붕 아래에서 하라’고 노래한다. 한 수필가는 아무리 애를 써도 만져지지 않는 견갑골 아래 후미진 골짜기에 외로움이 산다고 했다. 가려움이야 효자손으로 해결되겠지만 사람 손이라야 외로움을 긁어낼 수 있을 터이다.

저녁 시간에 운동을 위해 아내와 동네를 걷는다. 가끔 손을 맞잡을 때면, 순식간에 촉감끼리 수많은 대화를 나눈다. ‘졸혼’이라는 말을 들어보았느냐고 했더니, 아내의 눈빛이 묘하다. 청각장애인이 소리를 보듯, 나는 눈빛을 듣는다. 아직 갈 길 멀었다고. 내게는 운명재처(運命在妻)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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