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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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수/수필가

초여름의 햇살이 비파나무의 쭉쭉 뻗은 가지 위로 쏟아지듯 내려앉고 있다. 옆 건물 모롱이를 돌아 들어온 바람은 넓고 긴 비파 잎을 밟고 설렁설렁 춤을 춘다. 이에 맞추려 함인지 동글동글한 비파 열매는 금빛 단장이 한창이다. 작년에는 모진 한파가 어린 열매를 죄다 떨어뜨렸었는데 금년에는 가지마다 몽실몽실하다. 이유 있는 반란인가 눌러 두었던 에너지를 남김없이 쏟아내고 있음이 분명하다.


비파나무는 앵두나무, 감나무와 함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인연의 끈이 되어 나와 한 장소에 뿌리내림을 하고 있다.


중학교 다니던 때였다. 보리 수확을 돕느라고 밭에 갔다 오는 길이었다.   건너 편 집 울타리 너머로 과일들이 노랗게 익어가고 있었다. 이름도 모르는 처음 보는 열매였다. 잠시의 궁금증은 그날 밤에 풀 수 있게 되었다. 저녁마다 또래들이 모여 놀던 우물가에서였다. 한 친구가 비파 서리를 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학교 숙제를 해결하고 밤이 깊어지면 다시 모이기로 약속하고 일단 헤어졌다. 얼마를 기다리다가 밖에 나와서 하늘을 쳐다보고 또 나와서 달의 위치를 살피기를 몇 번을 했다. 잠시 누워서 달의 느린 걸음을 원망하다가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비파 서리 모의는 그렇게 끝나고 기억 속에서도 아스라이 사라져 있었다.


고향 마을은 매서운 북서풍과 모래가 많은 토질 때문에 과수 농사를 하기에는 적합하지 못한 곳이다. 몇 집 건너마다 땡감나무가 고작이다. 온주밀감 도 심어 두면 너무 강한 신맛을 내고 만다. 귤화위지(橘化爲枳)의 난제를 극복해 보려고 도전했으나 얼마 못가서 꿈을 접고 말았다. 쓸 데 없는 짓을 했다는 자책과 이웃의 비웃음도 모른 체하였다. 제주시내로 집을 옮기고 학교 근무에 바쁜 일상이 계속되면서 과일나무에 대한 미련은 퇴색해 버렸었다. 


어느 해였는지 확실한 기억은 없지만 묘목가게 앞을 지나다가 우연히 비파나무 묘목을 보았다. 불현듯 옛 생각이 떠올라 한 그루를 샀다. 상추 같은 채소나 심자는 아내의 만류를 뿌리치고 비파나무 한그루를 심었다.


비파는 그리 흔한 과일이 아니어서 먹어보지 못한 사람들도 많다. 비파나무는 일본과 중국 남부 지방이 원산지라고는 하는데 우리나라의 남쪽 지방에도 널리 분포하여 있다. 영남 지방에서도 한 겨울 추위를 이겨내며 푸름을 잃지 않을 정도로 적응력이 강하다고 한다. 봄에 새순이 돋을 때는 연녹색으로 부드럽게 보이던 잎이 여름을 지나며 진한 녹색을 띄고 단단한 질감을 갖춘다. 고대 역사에 나오는 ‘비파형 청동 검’이나 청량한 음률을 연주하는 현악기인 ‘비파’ 의 모양이 비파나무 잎과 흡사하다. 


가을이 깊어지면 가지마다에는 노란 꽃망울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는다. 겨울을 지나는 동안 하얀 꽃으로 변신하여 인동(忍冬)의 시련을 겪으며 봄을 기다려야 한다. 비파 열매는 다른 과일에 비해 그리 달지도 못하고 새콤한 맛도 없다. 그러나 집안에 비파나무 한 그루가 있으면 약방에 갈 일이 없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로 쓰임이 많은 나무라고 한다.


잎은 어린 가지와 함께 말려 두었다가 차로 달여 마시고 열매는 설탕에 절여 효소를 만들어 먹을 수 있다. 비파주를 즐긴다는 한 친지의 말에도 귀가 솔깃해진다. 구연산과 여러 가지 비타민도 제공하지만 청폐(淸肺)에도 효능이 있다고 하니 나에게는 좋은 선물일 수밖에 없다. 어린 시절 백일해의 후유증으로 호흡기가 약해졌다는 어머니의 걱정을 자주 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비파나무에 열매가 달리기 시작한 지가 어느 새 십여 년이 지나고 있다. 그 동안 풍요와 빈곤을 되풀이 하는 걸 보면서 ‘어쩌면 우리 어머니들의 지난했던 그 때의 삶과 그렇게 비슷할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느 가지에는 너무 많이 달려서 무겁고 어느 가지에는 빈 잎만 무성하다. 다른 과일 나무들과는 겨울나기 방법도 다르다. 한겨울에 꽃을 피웠으니 벌들의 노랫소리도 나비들의 화려한 춤사위도 먼 나라 이야기였을 터이다.


손을 뻗어 낮은 가지에 달린 비파 한 알을 땄다. 뽀얀 털을 손바닥으로 비비고 한입 깨물어 본다. 과일 향이 은근할 뿐, 단맛이나 상큼한 식감으로 혀를 유혹하지는 않는다. 딱딱한 씨를 뱉어내고 먼 하늘을 본다. 비파나무는 스스로를 드러내려는 애씀이 없기에 더욱 드러나는 존재가 아닐까. 그래서인지 초여름의 햇살만으로도 충분히 익었노라고 방싯거리고 있다.


이제 열매를 따는 손길이 스치고 나면 그 진한 푸름의 계절은 비파가 익던 초여름의 감흥을 기억이나 하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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