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산담 무덤은 세계서 제주가 유일…문화윤산 가치 높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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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의 눈에 비친 산담
▲ 산담은 조상을 모시는 성소가 되기도 한다.

▲일본인 이즈미 세이치(泉靖一)가 본 산담
일본의 인류학자 이즈미 세이치(泉靖一·1915~1970)의 저서 ‘濟州島’는 1938년 경성제국대학 졸업논문 ‘제주도-그 사회인류학적 연구’를 보완하여 1966년 도쿄대학에서 출판되었다. 그의 저서 ‘濟州島’ 중 ‘장식(葬式)’조에는 1930년대 제주의 장법이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조선 세종 때 정착되면서 장려되었던 회격묘가 일제강점기까지 행해지고 있었고, 산 능선의 밭에다 용묘를 조성하여 산담을 두르고 있다. 이것은 얼마 전까지의 제주의 무덤 조성 방법과도 큰 차이가 없다.


이즈미 세이치는 “묘자리는 사전에 준비해둔다. 그 묘자리는 산 능선의 밭에 만든다. 묘혈(墓穴)은 직경 약 4미터, 깊이 2~2.5미터를 파고 그 밑에 회격(灰隔)을 넣고 물을 뿌려 단단하게 한 다음, 관이 광중(壙中)에 꼭 맞도록 묘혈을 판다. 장례 행렬이 도착하면, 친척들이 곡물을 태운 재를 바닥에 깔고, 근친들이 손수 관을 내려놓고 상주가 명정을 관에 덮는다. 그리고 그 위에 개판을 놓은 다음 점토로 덮고, 상두꾼들이 다시 흙을 덮어 흙 만두(土饅頭) 모양으로 봉분을 쌓는다.

 

그 주변에 화산암으로 돌담을 쌓는다. 개판은 될수록 질 좋고 단단한 목재를 사용하는데 그 목재의 질에 따라 죽은 사람에 대한 정성의 정도가 있다고 한다. 좋은 개판은 구상나무, 구실잣밤나무, 소나무, 벚나무 등인데 이들 나무는 썩을 때 골고루 썩기 때문에 시신도 이와 같이 골고루 썩는다고 믿는다. 봉분에는 용미를 만든다.”라면서 무덤 내부를 그림으로 그렸다.  그러나 무덤의 내부 그림을 볼 때 시신의 좌향이 반대로 그려진 것이다. 제주의 지형 상 시신의 머리는 항상 높은 쪽으로 가며, 머리가 있는 방향이 용미가 되는 데 용미는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물을 가르는 역할을 한다.


▲서양인이 본 산담
그렇다면 서양인들은 제주 산담을 어떻게 보았을까.


애서 애덤스(Arthur Adams·1820~1878)는 다도해와 제주도를 탐사하기 위해 왔던 영국 제국주의의 함선 사마랑호의 군의관이자 동물학자로서 제주도 탐사 후 ‘켈파트 섬 박물학’이라는 글을 썼다. 그 글에 보면, 켈파트, 즉 제주도에 대한 화산도의 인상이 생생하다. “섬의 표면은 온통 거대한 바위와 식물들이 자라는 뜬돌들로 덮여 있었다. 한편으론 수많은 돌로 낮고 단단하게 축조된 사각형의 울타리가 있었는데, 그 안에는 두 사람의 봉분이 있었다. 그것은 내 인생에서 본 가장 괴기스러운 무덤형태로 남아 있다.” 애서 아담스는 사각의 울타리, 즉 산담 속에 쌍묘가 있는 것을 보았고, 쌍묘를 두른 산담을 자신의 인생에서 본 가장 괴이한 무덤형태라고 생각했다. 평장 후 묘비를 세우는 기독교의 무덤 양식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애덤스의 인식대로 사실상 봉분을 산담으로 두른 무덤의 모양은 세계에서 제주도가 유일하다. 이것이 오늘날 제주 산담이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다시 말해 서양인 아담스가 본 괴이한 무덤형태 산담은 거꾸로 세계에서 가장 독창적인 무덤양식이라는 자부심이 되는 것이다.

 

▲ 현무암 동자석은 자연과 한몸이 된다.

그러나 오늘날 산담을 보라. 문화유적 관리에 취약한 제주도는 산담을 단지 죽은 자의 씨신처리 공간으로만 인식하고 있다. 600년의 긴 세월 동안 축조된 산담과 무덤 앞의 동자석의 처지는 갈 곳 없는 나그네 신세가 됐다. 화려하게 떠드는 관광이라는 말 뒤에는 빠르게 사라져가는 제주의 고귀한 유산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화장을 장려하는 말 속에는 투기 자본의 즐거운 비명이 담겨 있다. 묘지 관리가 힘들어 산담 안 유골을 화장함으로써 소위 묘지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개발권자들의 토목 공사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봉분을 파헤쳐 화장해버린 빈 산담은 이제 무용지물처럼 쓰레기 취급을 당하고 있다. 어쩌면 제주를 지키는 제주다운 생명은 우리의 문화유적이다. 외국에 가서 감탄해 마지않는 그네들의 유적을 보며 우리는 우리의 문화유적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못하는 걸까. 침략자든 방문자든 제주에 온 이방인들은 먼저 제주의 자연과 돌문화에 찬사를 보내는 것을 왜 방기하는 것일까.  

 

진정 ‘제주의 제주다움’은 돌문화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만일 돌담이나 산담이 없는 제주도를 상상해보라. 마을이나 밭에 돌담이 없게 되면, 육지의 흔한 어느 중·소도시와 다르지 않게 된다. 또 오늘날 들녘에 산담이 있음으로써 제주만의 독창적인 경관을 갖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산담을 혐오시설로 규정하는 것에 반해, 애서 아담스의 말대로 “내 인생에서 본 가장 괴기스러운 무덤형태”라는 인상은 지구상에 그 어디에도 없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라는 말의 직접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사마랑 호의 선원이자 화가인 프랭크 매리엇(Frank Marryat·1826~1855)은 ‘켈파트 섬 견문록’이라는 글에서 “우리들 안쪽으로는 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그 멀리로는 정상에 구름으로 뒤덮인 높은 산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평원은 대부분 개간되어 있었으며, 그렇지 않은 불모지는 묘지로 쓰이고 있었는데 우리는 그런 몇몇 지점을 통과했다. 무덤 앞 쪽엔 인간을 형상화 한 돌 조각상들이 있었는데 예배소(Chantry)는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고영자, 2014).” 라고 제주 무덤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밭 안의 산담의 풍광과 그 속에 동자석을 세운 모습을 프랭크 매리엇은 관찰하고 있다.  


스위스 작가이자 사진가인 니콜라 부비에(Nicolas Bouvier·1929~1998)는 1970년 일본 오사카에서 열리는 만국박람회 스위스 대표단 자격으로 참가한 후 제주도로 건너와 한라산을 등반했다. 이때 쓴 제주도 여행기가 바로 ‘1970년 6월, 제주도’라는 글이다. ‘껠끄파르(Quelquepart) 무덤들’이라는 중제에서 부비에는 “이 섬(제주도·필자 주)은 그냥 ‘어딘가(Quelquepart)’이다.(…)아니 웬 무덤들! 그것은 가장 부드러운 잔디로 입힌 봉분들인데, 대부분 그 주변엔 현무암으로 된 울타리가 쳐져있다. 봉분들은 가볍게 불룩 튀어나와 경쾌한 허파와도 같다. 토속적인 무덤들에서는 고인의 머리가 동쪽에 안장되었다.(…)시골 구석구석마다 무덤으로 넘쳤다.(…)이것들은 지각할 수 없는 가녀린 슬픔, 푸른 초록의 지복(地福)을 머금으며 봉긋하게 솟아있다(고영자, 2015).” 라고 산담의 인상을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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