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 단상
보릿고개 단상
  • 제주신보
  • 승인 2017.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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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섭. 시인/수필가

지난 세월, 우리에게는 ‘보릿고개’란 시절이 있었다. 1950~1960년대, 식량이 부족해 그만큼 보리밥 한 끼 제대로 먹기가 힘들었던 가난의 슬픈 눈물을 삼켰던 때였다.

북서풍, 하늬바람이 부는 늦가을에 씨 뿌려 파종을 하고 이듬해인 유월이 오면 누렇게 익은 곡식을 수확해서 거두어 창고에 저장해 두어 먹다 보면 일 년 먹을 양식이 바닥이 났다.

이렇듯 새로 파종한 보리가 미처 여물지 않아 식구들이 먹을 식량이 부족해 끼니를 거르는 등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던 시기를 보릿고개라고 불렀다.

보릿고개 시기에는 이른 봄부터 모든 식량이 떨어져 극히 일부의 가정을 제외하고는 보리를 방앗간에서 기계로 두 번 세 번 깎아(도정·搗精) 버린다는 생각은 엄두도 못 냈다.

이때 농민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잘깎은 보리밥을 먹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때였다. 두세 번 보리를 깎아 버리면 보리 알맹이가 적어지기 때문에 가난한 집안은 한 번 정도만 보리를 깎아 거친 보리밥을 그대로 먹어야 했다.

부잣집은 여러 번의 보리를 잘 깎아 밥을 지으면 매끄럽고 윤이 진 주안상 잘 차려놓고 맛있게 지어 먹었는지 모른다.

어린 시절, 가까운 친척집에 제삿날이나 돼야 쌀밥을 얻어먹을 수가 있었다. 파제를 기다려 한참 잠을 자다 졸린 눈을 억지로 비비며 일어나 제삿밥을 먹는데 어른은 수북이 쌓아올린 고봉밥을 어린아이들은 반 그릇을, 고깃국에 맛나게 먹었던 때였다.

그 후, 많은 세월이 흘렀다. 어렵고 힘들었던 지난날, 요즘은 생활도 많이 나아져 먹을거리가 넘쳐난다. 어느새 하얀 쌀밥에 인스턴트식품까지. 이제 보릿고개 시절이란 말은 말 그대로 전설 같은 옛말이 돼버렸다.

옛날에 비해 오늘날 식생활을 살펴보면 하루에 한 끼 이상을 먹지 않은 사람은 세 끼를 모두 먹는 사람에 비해 칼슘, 비타민 같은 필수 영양소 부족 비율이 높다하니 우리의 마음과 건강에 빨간불이 켜진 게 아닌가 싶다.

꽁보리밥을 먹던 지난날, 그러나 요즘은 하얀 쌀밥마저도 잘 먹으려 들지 않은 세상에 살면서 우리 자신들에게 물어야 할 질문인 것 같다.

조냥의 정신(절약 정신)이 아니라 먹을거리가 넘쳐나는 세상에 살다 보니 배가 부른 모양이다. 그러나 우리는 땀 흘린 농민의 수고와 허리띠를 졸라매며 열심히 살던 그날의 소중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최근 교회 다녀오는 길, 누렇게 익은 보리밭 들녘을 지나오게 돼 감회가 새로웠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의 뒤를 따라 잔돌덩이 발에 차이며 유월의 부는 바람을 맞고 누렇게 잘 익은 당시의 보리밭. 그 한가운데 누워 바닷물결처럼 술렁이는 풍경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곤 했다. 그러면 따갑게 내리쬐는 햇볕을 맞으며 땀에 젖은 갈 적삼 입고, 혼자서 깊은 한숨 내쉬며 보리 단을 묶곤 하던 모습과 어머니가 지어준 보리밥을 먹었던 때가 떠오른다.

봄 제비 시원스레 들녘을 날아오르는 그리운 호시절. 소등에 멍에 매고 베적삼 입은 촌로, 가슴허비는 밭갈이 ‘어허랴’ 호령 소리에 저만치서 슬피 우는 산새 소리가 퍼질 때면 해가 서산마루에 저물어가던 농촌의 들녘, ‘밀레’의 ‘이삭을 줍는 여인’ 명화처럼 한 농촌의 풍경이 펼쳐진다. 농사일을 보람으로 여기며 고생하시던 어머님의 모습이 선하게 추억의 한 자락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유월도 저물었다. 아내가 정성껏 차려준 저녁상 앞에서 우리 부부는 두 손 모으고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