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머릿속 기억들이 사위어간다. 아흔 넘는 생이 쌓아둔 무게를 덜어놓는가 보다. 땅거미 내리는 할아버지 삶에 소소리 바람도 심드렁하게 지나쳐간다. 나이 들어 치매 온 것이 뭐 새삼 별스러운 일이냐는 듯 시름없는 소리만 하고 간다. 봄 가면 여름·가을·겨울 오는 법, 이른 봄 시샘하는 소소리 바람이 유난스레 세찬 올해다.


그 해도 봄바람이 매서웠다. 서울꼬맹이가 부모 손을 붙잡고 제주도 할아버지 댁을 찾은 날, 제주바람도 밤새도록 목 놓아 울어주었다. 지지아이라서 울기나 하고, 밥도 주지 마라. 할아버지의 불호령이 무서워 속울음을 삼켰었다. 남존여비가 심했던 할아버지에게 나는 맘에 차는 손녀가 아니었다. 여섯 살 꼬마 눈에 할아버지는 마을입구 장승마냥 무서웠다. 제 키 보다 여섯 자나 더 큰 장승이 휘날리는 눈썹으로 보고 있는 모습이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다.


데면데면하는 손녀딸을 할머니는 밤마다 꼭 껴안고 재워주셨다. 강파른 소소리 바람이 할머니 사랑을 시샘한 것일까? 열꽃이 나를 덮쳤다. 온몸이 달아올라 땀이 뒤범벅이었다. 축 늘어진 나를 안고 할아버지는 보건소로 내달리셨다. 나보다 여섯 자나 더 큰 할아버지는 열도깨비를 무찌르는 장수셨다. 정신을 잃던 흐릿한 기억 속에서도 뜨뜻미지근한 것이 내 얼굴 맡에 떨어지는 걸 잊을 수가 없다. 할아버지의 땀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참으로 따뜻했었다. 처음으로 할아버지가 마을을 지키는 장승처럼 내 곁에 있는 수호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제는 사그라지는 할아버지 기억 속에 불씨 꺼질 추억이 되겠지만 지난날 할아버지의 마음은 내게 여전히 훈훈하다.


할머니는 자식·손주 잘 되라고 새벽마다 정화수를 떠서 기도를 하셨다. 내가 예닐곱 살 쯤 일로 기억한다. 할머니의 말을 믿고 나 역시 열심히 기도를 했었다. 어서 부모님이 저를 데리러 오게 해주세요. 하지만 내 소원은 깜깜 무소이었다. 나는 할머니께서 기도상의 맛난 거를 손대지 못하게 하려고 거짓말을 한다고 여겼다. 내 소원이 이뤄지지 않았으니 더는 기도상이 내겐 의미가 없었다. 할머니 몰래 한 두 개씩 곶감과 쌀과자를 집어 먹었다. 정화상에 올리는 음식을 먹으면 조항신이 노해 동티가 난다는 말을 흘려들었다. 사라지는 음식을 눈치 채고 할머니가 매를 드셨을 때 막아주시던 분이 할아버지셨다. 지지아이라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혼낼 줄 알았는데, 할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으셨다. 대신 그 후로 장에서 전병과 뻥튀기를 사서 부엌에 놓아주곤 하셨다.


잔정 깊은 할아버지의 내색 없는 사랑이 가끔 야속할 때도 있었다. 온종일 밭에서만 사는 할아버지가 그 때는 이해가 안 되었다. 1920년대 태어나서 4·3사건, 6·25전쟁을 치렀던 할아버지에게 가장으로서 아버지로서 무게는 무거웠을 거다. 가족들 굶주리지 않기만을 바라며 쉼 없이 일만 하셨을 거다. 부지런하고 알뜰한 삶이 몸에 배여 소처럼 일만 하신 할아버지 생이 곰삭아 있다. 오래되어 색이 바래고 푸슬푸슬해진 할아버지 옷들을 빨랫줄에 널어본다. 햇살에 윤이라도 나길 바라는 마음이 곰삭은 할아버지 생을 위로해준다.


어쩌면 그 때 동티가 지금 할아버지 머릿속에 자리 잡은 건 아닐까. 할머니 말마따나 정말로 소원은 이뤄졌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해 부모님은 기적처럼 내 옆에 있어주셨다. 그러면 정화상을 건든 죄로 동티나는 벌은 누가 받고 있는 것일까. 나를 감싸준 할아버지가 내 동티를 대신 막아주고 계신 건 아닐까. 열꽃 도깨비도 무찌르던 할아버지가 아귀차게 치매도 이겨내길 내내 기도한다. 무람없이 찾아오는 치매한테 헛물켜지 말고 조용히 가시라고 곰살맞게 굴어볼까. 아궁이 불쏘시개를 들고 호되게 혼을 내볼까. 고구마·감자를 구워 그 옛날 할아버지 마음을 치매에게 전해볼까.


수그러지는 할아버지 기억이 해거름녘에 걸려있다. 붉게 타오르던 생이 의연해 보인다. 하나둘씩 내려놓는 할아버지 기억들이 붉은 노을 따라 긴 그림자를 펼쳐낸다. 아직은 사라지기 아쉬운 듯, 할아버지도 기억들도 서로의 손을 쉬이 놓친 않는다. 조금만 더 버텨주고, 조금만 덜 아프게 해주렴. 할아버지 사랑이 내게 알알이 영글어 간다. 푼푼하고 소담스럽던 할아버지 마음이 눈물겹도록 감사하다. 이젠 할아버지 보다 서너 자는 커서 지켜줄 수 있는데, 할아버지 치매에 손 놓고 있는 내가 미울 따름이다. 단지 할아버지 손을 맞잡아 줄 수밖에…. 할아버지 생이 한 줌 햇살처럼 빛나고 있고 여전히 따뜻하다고 속삭여 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