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무덤의 구분-조선시대 신분은 삶과 죽음 아우르는 영원한 '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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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선조의 목릉. 조선시대에는 신분에 따라 무덤의 모양과 크기, 석물에 영향을 미쳤다.

▲백성은 어디까지인가
조선시대의 묘지는 크게 능묘(陵墓)와 민묘(民墓)로 구분할 수 있다. 능묘는 능(陵)·원(園)· 묘(墓)로 다시 구분할 수 있는데 능(陵)이란 왕과 왕비, 사후 왕호가 추증된 자의 무덤을 말하며, 원(園)은 왕의 친부모, 왕세자와 그의 비(妃)의 무덤을, 묘(墓)는 대군(大君), 공주(公主), 옹주(翁主), 후궁(後宮) 등의 무덤을 말한다.    


그렇다면 민묘는 어떻게 구분 지을 수 있을까. 중세의 민(民)의 개념이 오늘날 시민사회의 민의 개념과는 큰 차이가 있다. 중세사회가 철저한 왕권 중심의 계급사회라는 점에서, 민은 다양한 계급을 포괄하는 개념인 것만은 분명하다.


김석형(金錫亨)의 ‘조선봉건시대 농민의 계급구성’ 중 ‘양인론(良人論)’에는 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양인(또는 양민)은 사회적으로 보통 말할 때는 물론이요, 국가적인 공식적 문헌들에서까지 평민(民)·서민(庶民)·상민(常民)이라고도 많이 불렸다(…)물론 ‘서인’ ‘서민’ ‘상민’ 또는 ‘상인’ ‘평민’이라는 표현은 그 이전 조선조 시대에 있어서도 법률적 표현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 안에는 때로 노비까지도 포함될 수도 있었다. 더욱 이 ‘민(民)’이라고만 할 때에는 이를 국가 대 인민 내지는 국민이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하는 경우가 있어서 여기에는 양반들까지 포함될 수도 있다. ‘백성’이라는 말은 우리나라 기록들에는 ‘민’과 거의 언제나 동일하게 쓰여 왔다. 오늘날까지 ‘民’의 훈(訓)을 ‘백성’이라 함이 이를 실증한다(…)즉 ‘양인’은 백성·민·평민·서민·상민이라고도 비교적 막연하게 표현되었으나, 반대로 백성·민·평민 등의 말 가운데는 양인뿐만 아니라 때로는 다른 신분층까지도 포함되었던 것이다.”


▲무덤의 신분적 구분 능·원·묘


김석형의 말에 빗대면, 우리는 쉽게 능묘 가운데 능, 원, 묘의 신분을 제외한 양반계급의 무덤까지를 민묘의 범주로 이해해도 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즉 중세에서는 왕권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양반 이하 모두를 ‘왕의 백성’이라는 점에서, 민의 개념에 포괄할 수가 있는 것이다.


또 이중환(李重煥·1690~?)의 ‘택리지(擇里志)’ 총론에는 비교적 자세한 신분 규정이 나타나 있어 조선시대의 신분의 계급구성을 이해하는데 참고 할만하다.


“종실(宗室·왕족)과 사대부는 조정에서 벼슬하는 집이 되고, 사대부보다 못한 신분은 시골의 품관(品官·품계가 있는 벼슬, 正·從 1~9품계)으로 중정(中正·하급관직으로 일정기간 시험 후 등용됨)과 공조(功曹·‘司功’이라고도 함. 제사, 예악을 맡았던 하급 잡무직) 따위가 된다. 이보다 못한 신분은 사서(士庶), 장교(將校), 역관(譯官), 산원(算員), 의관(醫官)과 지방 한산인(閑散人·한량, 무인으로서 아직 관직에 임명되지 않은 자)이 되고, 또 못한 신분은 이서(吏胥), 군호(軍戶), 양민 따위가 되며, 여기에서 더 못한 신분은 공사(公私)의 천한 노비이다. 노비로부터 지방아전이 하등신분으로서 한 계층이고, 서얼(庶孼) 및 잡색(雜色·잡무를 맡은 자)이 또 중등 신분으로서 한 계층이고, 품관과 사대부를 한 가지로 양반이라 한다. 그러나 품관이 한 계층이고, 사대부는 또 따로 한 계층이 된다. 또 사대부 중에도 대가(大家)와 명가(名家)라는 한계가 있어, 명목이 많고 서로 통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의 신분 규정은 삶과 죽음을 모두 아우르는 영원한 굴레와 같은 것이었다. 신분은 세습되었고, 세습되는 만큼 낮은 계층일수록 그 설음의 깊이도 깊었다. 그러기에 하층민에게 있어서 면천(免賤)과 신분상승은 최대의 소망이었다. 삶에서 억압되었던 신분제도는 죽어서도 무덤의 크기나 석물에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경국대전(經國大典)-예전(禮典)’ 중 ‘상장(喪葬)’ 조에 보면, 묘지의 구역을 법으로 신분에 따라 정하고 있다.


“분묘(墳墓)는 경내(境內)의 구역(區域)을 한정(限定)하여 경작(耕作)과 목축(牧畜)을 금(禁)한다. 종친(宗親)으로 1품(一品)은 사방 각 백보(四方 各百步)를 한계(限界)로 하고, 2품(二品)은 90보(九十步), 3품(三品)은 80보(八十步), 4품(四品)은 70보(七十步), 5품(五品)은 60보(六十步), 6품(六品)은 50보(五十步)로 하며, 문무관(文武官)은 차례로 10보(十步)씩을 체감(遞減)하고, 7품(七品)이하 및 생원(生員), 진사(進士), 유음자제(有蔭子弟)는 6품(六品)과 같다. 여자는 남편의 관직을 좇는다.(…)경성(京城·도읍의 성)에서 10리 이내와 인가(人家)의 100보 내에는 매장하지 못한다”

▲ 김만일의 부모인 김이홍 부부의 원묘

신분과 품계(品階)에 따라 무덤의 규모도 다르지만 무덤의 모양 또한 다르다. 무라야마 지쥰(村山智順)의 ‘朝鮮의 風水’에는 “왕공(王公)이하 사대부의 분형(墳形)은 대개 원형(圓形)이며, 일반 서민의 그것은 대개 유형(乳形)또는 돌형(突形)을 이룬다.”고 했다. 여기에서 무라야마 지쥰이 말하는 유형(乳形), 돌형(突形), 또는 유돌분(乳突墳)이라는 일반인의 무덤은, 용묘(龍墓)를 말하는 것으로써 무덤의 후면, 즉 머리 부분에 꼬리처럼 끝이 달려 있는 무덤으로 조선시대 가장 일반적인 무덤 형태인 것이다. 고려시대의 토광묘는 사대부 중심의 방묘(方墓)가 중심이고 일반 백성의 묘는 보이지 않는다. 또 원묘(圓墓)는 조선 초기까지 나타나다가 조선중기부터 용묘(龍墓)로 바뀌면서 조선후기가 되면 용묘가 일반적인 봉분이 된 것이다.


 ▲제주의 무덤의 형태들
그렇지만, 제주에서는 조선 초기에도 방묘(方墓)가 나타나며, 원묘(圓墓) 또한 간혹 조선 중기까지도 혼재되어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소위 왕도(王都)에서 멀리 떨어진 변경(邊境)이라 그런지 묘제 또한 변화의 속도가 늦게 나타나고 있다. 하나의 문화권에서 만들어진 양식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하나의 양식이란 서서히 얼음이 어는 것처럼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조선시대는 무덤의 크기를 신분에 따라 결정했다. 물론 고대로부터 무덤의 양식은 변해왔지만 조선시대처럼 신분별로 세세하게 법령으로 구분하고 규제했던 예는 없었다. 이런 신분적 제약은 뱃속에서부터 무덤까지 적용되어 한번 결정된 신분의 틀은 사회제도적으로 그 신분에 맞는 삶을 세습하면서 살아야만 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조선 말기에 오면 신분 상승을 위한 매관매직(賣官賣職)의 사례가 빈번하게 등장하고, 가문을 중흥시키기 위해서라면 어디라도 발품을 팔며 명당을 찾아 나섰다. 얼마나 신분의 굴레가 지독했으면 무덤의 모양에서부터 크기, 부장품(副葬品), 구석물(具石物), 심지어 관곽(棺槨)의 색깔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었는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을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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