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백년 시공간을 넘어…아프지만 고운 사랑을 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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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유수암리
▲ 김해곤 作 꽃다운 이름은 천고에 아욱처럼 맵게 기리우리니.

구슬과 향기 땅에 묻혀 오래된 지 몇 해던가

 

그동안 누가 그대의 원통함 저 하늘에 호소했나

 

머나먼 황천길 누굴 의지해 돌아갔을까

 

푸른 피 깊이 묻혀버린 죽음을 나와의 인연 때문

 

영원히 아름다운 그 이름 형두꽃 향기처럼 맵고

 

한 집안의 높은 절개는 아우와 언니 모두 뛰어났어라

 

가지런히 두 열녀문 지금은 세우기 어려워

 

무덤 앞에 푸른 풀 해마다 되살아나게 하려네

 

-의녀 홍윤애에 대한 조정철의 추모시

 

▲ 스물여덟 번째 바람난장이 애월읍 유수암리에서 열린 ‘제5회 의녀 홍윤애문화제’에서 펼쳐졌다. 사진은 바람난장 가족들의 모습.

 

애월읍 유수암리 어느 푸른 언덕.

 

거기에 무덤 두 기를 품은 산담이 있고, 꽤 오래된 비(碑)가 있다.

 

스물일곱 번째 바람난장은 이 무덤 앞에서 펼쳐지는 제5회 의녀 홍윤애문화제와 함께 했다. 의로운 향토사의 한 부분을 껴안고자 하는 취지다.

 

음력 윤5월 15일, 홍윤애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지 236년이 되는 날! ‘부활하라, 사랑’이란 주제의 시극이 펼쳐졌고, 전라도방어사의 옷차림을 한 제주목사 조정철이 홍윤애를 향해 하늘에 절규하듯 추모시를 읊었다(연극인 이병훈 씨가 조정철 역, 시 낭송가 문선희 씨가 홍윤애 역을 맡았다).

 

▲ 나종원씨가 소프라노 색소폰으로 ‘동심초’ 연주를 선보이고 있다.

우산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다만, 애절한 그 목소리가 가랑비 되고 안개비 되어 우리의 옷 대신에 가슴을 ‘풀착하니’ 적셨다.

 

대체 조정철과 홍윤애는 누구이며, 무슨 관계였을까?

 

조정철은 조선왕조 오백 년 동안 제주에 왔던 목민관 약 320여 명 중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인물이다. 반역죄에 연루되어 제주에 귀양 와서, 29년의 유배 생활(육지에서 2년 포함)을 견뎌내고 기어코 살아남아 자원하여 제주목사 겸 전라도방어사로 제수되어 내려왔다.

 

홍윤애는 27세의 젊은 선비 조정철이 제주에 유배 왔을 때 뒷바라지를 해주다가 그 인품을 존경하게 되고 마침내 사랑에 빠진 제주 여인이다. 정치적 숙적 관계인 목사 김시구가 유배인 조정철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갈파하고, 온갖 회유와 혹독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죽음으로써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냈다.

 

홍윤애를 사모하는 모임이 주최·주관하고 문화패 바람난장과 양주조씨 대종회가 후원한 <의녀 홍윤애 문화제>는 여는 마당으로 나종원의 소프라노 색소폰 ‘동심초’가 -무어라 맘과 맘을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하는 가사를 품고 애절하게 연주되자 장내는 한순간에 숙연해졌다. 강관보(전 제주도의회 사무처장)의 홍윤애 소개, 이어서 전통식 제례봉행이 거행됐다.

 

▲ 제주도립 서귀포관악단원인 김동현씨가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 주제곡으로 잘 알려진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 2악장을 연주하고 있다.

제2부 문화제가 시작되자마자 소리꾼 은숙의 ‘상사화’ 노래에 따라 갑자기 산담 위로 팔 하나가 쑤욱 뻗어 나왔다. 무용가 박연술의 오른손이었다. 그의 손엔 상사화 대신 주홍빛 능소화 꽃가지가 들려 있었고 한 송이 한 송이 꽃송이를 뿌려 떨치며 온몸으로 펼치는 춤사위는 200여 명 참가자들의 가슴에 시린 성에꽃을 피워내기에 충분했다. 그야말로 그들은 무대를 탓하지 않는 진정한 프로였다.

 

이어서 김동현(제주도립 서귀포관악단원)이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 주제곡으로 유명한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 2악장을 연주했다. 소프라노 강윤희의 꿈길밖에 길이 없어 꿈길로 가니/ 그 님은 나를 찾아 길 떠나셨네/ 이 뒤엘랑 밤마다 어긋나는 꿈/ 같이 떠나 노중에서 만나를 지고, 가곡 ‘꿈길’의 가사는 오로지 홍윤애와 조정철의 심정 그대로인 듯했다. 오로지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을 위하여 죽음도 마다않았던 여인에게 바친다며 고경권은 하모니카로 ‘사랑이여’를 열창했다. 그 시간, 그 장소는 시대를 초월하여 그야말로 조정철과 홍윤애의 사랑과 죽음의 이중주가 피 울음의 곡조로 흐르는 듯했다.

 

홍윤애를 사랑하는 모임 대표 김순이 시인은 말한다. “제주역사에서 홍윤애 만큼 제주여인의 기개를 드높인 여인은 찾아볼 수가 없다. 진주에 논개가 있다면 제주에는 홍윤애가 있다. 남원에 춘향이가 있다고 하나 그것은 한갓 소설이요, 홍윤애의 사랑은 역사적 사건”이라고.

 

그는 또 “앞으로 제주도민의 정성과 사랑으로 행사를 치를 계획”이라며 금년 안에 ‘홍윤애기념사업회’를 발족하기 위한 모든 체제를 갖추겠다고 말했다.

 

▲ 시 낭송가 문선희씨가 의녀 홍윤애에 대한 조정철의 추모시를 낭송하고 있다.

홍윤애와 조정철,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끝난 것이 아니다. 사랑과 정의가 황금만능주의에 밀쳐져 가는 이 시대에 의녀 홍윤애가 죽음으로 일궈낸 사랑의 가치와 불의한 권력에 대한 저항과 기개야말로 우리가 되살려야 할 소중한 가치일 것이다.

 

 

글=오승철

그림=김해곤

사진=허영숙

연주=나종원·김동현·고경권

시극=문선희·이병훈

춤과 노래=박연술·은숙

음악 감독=이상철

 

 

※다음 바람난장은 7월 15일 오전 10시 명월리 백난아기념관과 오후 1시 금능해수욕장 원담에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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