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시 아라동에 위치한 고조기 방묘에서 내려다 본 탐라원 경내.

현존하는 제주의 방묘는 고려시대에 조성된 문경공 고조기 무덤이 가장 오래되었다. 다음으로 삼별초 진압군 장수로 제주에 와서 전사한 영광부사 傳(전)김수 장군 방묘가 산세미 오름 기슭에 있으며, 그 외 제주의 방묘들은 대개 여말선초 입도조 자손들이 조성한 무덤들이다. 그만큼 고려시대 무덤은 희귀하며 더구나 전해오는 민묘가 없어 그 실체를 알지 못한다. 오늘날 제주의 들녘에 산담이 있는 무덤들은 대개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들로서 성리학의 영향으로 흥성하기 시작했다.    

     
▲고조기의 시
숲길 끝나 멈추어서니 (行盡林中路)
포구에 때때로 오고가는 배 (時回浦口船)
천리의 땅 물로 둘러진 곳 (水環千里地)
한라산이 하늘가를 막았네 (山礙一涯天)
대낮에 테우 탄 외로운 나그네는 (白日孤槎客)
청운에 올랐던 천상의 신선이었네 (靑雲上界仙)
돌아오니 느낀 것이 하도 많아 (歸來多感物)
취한 김에 시를 읊어 강바람에 날리네 (醉墨灑江煙)

 

이 시는 ‘동문선(東文選)’에 실린 고조기의 ‘진도강정(珍島江亭)’이라는 오언율시(五言律詩)다. 벼슬살이 중 제주를 다녀온 직후 진도에서 고향의 감회를 적은 시로 보이는 이 시에서는 고조기의 포부와 제주의 토속적인 정서가 절절히 묻어나온다.


‘동문선(東文選)’에는 이 시 외에 ‘영청현(永淸縣)’, ‘금양현에 묵으며(宿金壤縣)’, ‘산장의 밤비(山莊雨夜)’, ‘기원(寄遠)’, ‘서운암진(書雲巖鎭)’, ‘안성역(安城驛)’ 등 7편이 수록돼 있어 고려시대 제주출신 문사(文士)가 지은 중요한 문학작품으로 고조기의 시문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고조기의 ‘산장의 밤비(山莊雨夜)’는 비온 뒤 중산간 마을의 정취를 잔잔하게 그려내고 있는데, ‘진도강정(珍島江亭)’이 제주에 다녀온 뒤의 느낌을 그렸다는 점에서 혹여 제주와 연결 지을 수 있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어젯밤 송당(松堂)에 비 내리니(昨夜松堂雨)
내에 흐르는 물소리 베개 밑까지 들려오네(溪聲一枕西)
먼동 트자 뜰 앞의 나무를 보니(平明看庭樹)
새들은 잠에 취해 아직 둥지를 떠나지 못하네(宿鳥未離棲)

 

   
▲ 고조기 방묘.

이 시에 나오는 송당(松堂)이 ‘소나무가 있는 집’, 혹은 지명(地名)인지는 모르지만, 송당은 현재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 지명과 같다는 점에서 의미가 새롭다고 할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당시 고조기가 송당의 어느 숙소에서 이 시를 지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송당은 900여 년 전에 설 촌 됐다고 한다. 제주 고씨와 여산 송씨가 먼저 송당에 자리를 잡았고 후에 김해 김씨는 셋송당에, 광산 김씨는 웃송당에 입촌해 마을이 커졌다. 솔당, 손당, 소남당은 송당의 옛 이름들이다. 제주 고씨가 송당의 설촌과 관계됐다고 하는 데서 고조기와의 연관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고씨 집안의 후예 고득종 또한 송당 인근 교래리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시대 제주인으로서 최고 벼슬길에 올라
고조기(高兆基)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사가집(四佳集)’, ‘동사강목(東史綱目)’, ‘홍재전서(弘齋全書)’, ‘일성록(日省錄)’, ‘해동역사(海東歷史)’, ‘심재집(心齋集)’ 등에 보인다.


고조기(高兆基)의 본관은 제주. 초명(初名)은 당유(唐愈), 호는 계림(鷄林)이고 시호(諡號)는 문경공(文敬公)이다.


아버지 고유(高維)는 벼슬이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이르렀다. 아버지 고유는 고려 정종(靖宗) 을유년(1045)에 남성시(南省試 또는 國子試)에 장원으로 급제해 생원(生員)이 됐다. 이듬해 다시 과거(賓貢)에 등제(登第)해 임금의 실책을 바로잡는 벼슬인 우십유(右拾遺)가 됐다. 문종(文宗)이 고유를 총애하자 주위에서 ‘제주사람’이라는 이유로 “간(諫)하는 벼슬을 시켜서는 안됩니다. 만약 그의 재주가 아깝거든 다른 벼슬을 시키소서”라고 말리니, 왕은 어쩔 수 없이 그 말에 따라 1070년 비서소감(秘書少監) 동북로병마부사(東北路兵馬副使)에 임명했다. 고유는 이듬해 과거를 주관하는 벼슬인 국자시(國子試)를 주관해 인재 77명을 뽑기도 했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고조기는 ‘성품이 강개하였고, 고금(古今)의 경서(經書)와 역사를 많이 읽었으며, 특별히 오언시(五言詩)를 잘 지었다(……)재직 중에 청백하게 복무하였다’고 한다. 성품이 곧고 꿋꿋하다보니 그를 배척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런 어려움을 모두 헤쳐 나갔다.  


고조기는 예종(睿宗) 정해년(1107)에 급제해 벼슬길로 들어섰다. 내관과 외직에 두루 종사하면서 주변으로부터 청렴하다는 칭송을 들었다. 인종(仁宗) 때에 시어사(侍御史)가 됐다. 시어사(侍御史)는 고려초기의 설치된 사헌대(司憲臺)를 어사대(御史臺)로 고치면서 설치한 것으로서 관청 명칭에 따라 두기도 하고 폐지하기도 했는데, 고려 문종 때에는 종 5품 벼슬아치 2인을 아래에 두기도 했다.


고조기는 이자겸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조정의 관리들이 이자겸 측에 서서 절조(節操)를 잃은 것을 보고 분개했다. 이자겸의 파당(派黨)들 가운데 화를 면했다가 후에 재상 자리까지 오른 자가 적지 않음을 알고, “비록 성상(聖上)께서는 관대하시어, 그들의 병질(病疾)을 덮어 주신다고 한들 그들이야 무슨 면목으로 조정에 서서 일월(日月·임금)을 우러러 보겠나이까?”라고 하며, 왕에게 극력 간쟁(諫諍)했으나 왕도 비록 고조기의 말이 옳다고 인정은 했지만 차마 관련된 대신들을 모조리 내보내지는 못했다. 그 후 고조기를 예부낭중(禮部郎中, 정5품) 으로 등용했으나 사실은 그 자리가 대관(臺官)의 자리를 뺏으려는 방편이었다.


의종(毅宗)이 즉위한 후 무진년(1148)에 정당문학판호부사(政堂文學判戶部事, 종2품)를 제수 받아 ‘지공거(知貢擧)’가 돼 여러 인재를 뽑았다. 지공거(知貢擧)란 고려 때 과거(科擧) 시험관이다. 지(知)는 ‘주관하여 본다’라는 말로서 각 지방에서 추천해서 올라온(貢來) 선비를 뽑는다는 뜻이다. 원래 지공거(知貢擧)는 당(唐)·송(宋)에서 통용된 말인데 고려에서 그대로 이를 받아들여 사용한 것이다.


백나용 기자 nayong@jeju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