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귀포시 법환동 지역의 항공사진으로, 월드컵경기장과 신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법환동은 강경옥의 고향이다.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가라加羅:생몰년 미상, 신라 신문왕神文王 때의 탐라의 사자. 일본 지통천황持統天皇 2년(A.D. 688) 8월 탐라왕 좌평佐平 가라加羅가 일본에 파견되어 지방 토산물을 교환하였다. ☆ 일본에서는 동년 9월 가라 등을 축자관築紫館에 초빙하여 연회를 베풀어 선물까지 주었다. 좌평은 백제 제일품第一品의 관위官位의 벼슬이다.


가리加利:생몰년 미상, 고려 정종 때의 탐라 성주星主이며 유격장군遊擊將軍(고려시대 종오품 무관). 1043년(정종9) 12월, 고려 조정에 입조한 바 있다. 왕자 두라豆羅가 사망한 것을 상주上奏(임금에게 말씀을 아뢰던 일)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가순價詢:생몰년 미상, 중종 때의 정의현감. 조정에서 사성司成 원수장元壽長을 제주에 파견, 불법행위를 적발하게 하자 내도, 이때 적발된 목사 권진權軫·정의현감 가순·대정현감 정운鄭雲·제주판관 한근韓謹 등이 왜적의 침입을 막지 못하여 책임을 추궁을 받았다.


가야잉加也仍:생몰년 미상, 고려 문종 때의 탐라 성주星主이며 유격장군遊擊將軍. 1068년(문22) 3월, 고려의 왕경에 탐라의 토산물을 수송해 들어가 물물교환을 하였다. 당시 개경에서 하던 불교 의식 팔관회에 사용할 예물과 명마名馬 등을 수송했었다.


가어내加於乃:생몰년 미상, 고려 선종 때의 탐라의 유격장군遊擊將軍. 선종宣宗 때 탐라의 토산물을 가지고 고려의 왕경에 입조하였다.


가을적加乙赤:생몰년 미상, 일명 가을치, 고려 공민왕 때의 제주의 목호牧胡(고려시대에 제주에서 말을 기르던 몽골인). 1356년(공민왕5) 10월, 목호 홀고탁忽古托과 공모하여 제주에서 반란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이 사건은 당시 고려 조정에서 임명되어 제주에 부임한 도순문사都巡問使 윤시우尹時遇와 제주목사 장천년張天年, 그리고 제주판관 이양길李陽吉 등을 죽이는 대반역 행위였다. 즉 탐라 땅에서의 몽고세蒙古勢와 고려세高麗勢의 국제적 충돌이 발생된 것이다. 이에 앞서 고려 조정에서는 목호들의 전횡이 극심함을 알고 도순문사로 파견, 이를 추궁하니 이와 같은 반역적 행동을 자행한 것이 드러났다.


가케이-이치죠影井市藏:생몰년 미상, 일제강점기의 일본인 교육자. 1912년 제주공립보통학교장 겸 제주공립간이농업학교 제2대 교장으로 부임했다. 제주농업학교(3년제)가 1912년 5월 6일 제주간이농업학교(2년제)로 교명을 개칭, 제주보통학교 교장 ‘가케이-이치죠’가 겸임 교장으로 발령되면서 황민화皇民化 교육으로 한국인을 일본인화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 일제의 식민 통치를 가속화시켰다. ※(필자의 변):3년제로 승격한 1920년 11월 1일부터 이날을 개교기념일로 정하여 해마다 축제 체육행사를 거행해 왔다. 1947년 입학한 나는 “봄에 하는 개교일을 왜 11월에 이르러 개교기념일을 하는가?” 늘 의심을 갖기 시작했다. 1980년 3월 모교 출신 은사인 강창수康昌洙 교장이 부임해서 인사차 찾아가 “일제강점기의 개교는 보통 봄에 하는 것이 통상관례인데 어째서 11월에 개교기념식을 합니까?”고 했더니 “글쎄 우리가 재학할 때도 그렇다”고 한다. 나는 교육사를 탐구하면서 모교 역사를 탐색했더니 이 날은 2년제의 학교가 3년제로 승격한 날이어서 교내 체육대회를 개최한 데서 비롯되었음을 후일 나는 밝혔다. 후일 강창수 교장은 나의 고증을 받아 5월 2일을 개교기념일로 환원했다. 이는 1910년 5월 2일 입학식을 가졌던 학적부의 기록에 의해 정정한 것이었다. 2007년 개교100주년 기념 주제 발표대회가 KAL호텔에서 개최되었는데 이때 주제발표자로서 나의 주장을 발표했다.

 

   
▲ 강경옥 얼굴 사진.

강경옥康慶玉:1907(융희1)~1999, 사업가, 정치가. 국회의원 및 참의원參議院 의원, 기독교 장로. 호는 희인希仁, 본관은 신천, 서귀포시 법환리에서 강형은康亨殷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강명옥康明玉, 강용옥康龍玉의 맏형이다. 일본 고베<神戶>의 간사이학원<關西學院> 문학부 사회과를 거쳐 교토시립 입명관立命館대학 문학부 사회학과를 졸업, 1950년 6월 제2대 국회의원 당선,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당선, 재선의원이 되었다. 참의원 제2부 의원으로 당선, 만년에는 부인 민순녀閔順女와 함께 선교 사업에 헌신하고 와싱톤시 소재의 하버드 신학대학을 졸업하여 92세로 미국 메릴랜드의 요양원에서 죽어 미국에 묻혔다.

 

일제강점기 시절 오사카에서 동흥토지건물회사 사장과 삼익三益고무회사 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6년 귀국하여 협신協信제약주식회사 사장으로 한림과 성산포 등지에 있던 적산敵産 옥도정기 공장을 인수 운영하였다. 국회의원에 당선, 차점자 오건일吳健一(위미) 변호사가 4,651표를 얻었다. 강경옥 의원은 1951년 1월 23일의 국회 제13차 회의에서 제2국민병 소집연령 문제와 관련된 질문에서 제주도 4·3사건으로 약 5만 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그 발언 요지는 “제2국민병에 대해서는 국법으로 만17세 이상 40세까지로 규정되었는데 45세까지 훈련을 받고 있는 일이 있습니다. 위법해 가면서까지 하는가? 또 하나는 제주도는 4·3사건 이후로 약 5만 명의 청장년이 죽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6·25사변 직전에 12만 정도의 남자 청장년이 있었는데 그 중 6~7천명, 또 제2국민병으로 1만 2천명 내지 1만 3천명, 지금 남아 있기는 10여만 명 밖에 없는데, 제가 작년 10월 말경에 제주도에 들어가니 그 당시에 이응준李應俊소장이 말하기를 ‘제주도에 대해서는 너무나 지독히 뽑아갔다.

 

그래서 다음에는 뽑아가지 않도록 하겠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45세까지 징집을 하고 있는데, 이와 같이 하면 제주도는 일꾼이 없어서 일을 못하는 형편에 있습니다. 국방부로서 거기에 대한 대책을 생각할 용의가 있는가? 없는가? 이 점을 묻고 싶습니다.”고 했다. 당시 사망자의 통계는 정부 측 발표와 각 언론계의 발표에서 보듯이 일치된 수치가 없다. 어떻든 이때까지의 제주출신 가운데서 가장 정부에 대해서 강력한 발언은 한 국회의원은 강경옥이었다. 도민들은 강경옥 의원이 정치적 수완을 발휘한 점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3대에 국회의원 당선했다. 1955년 자유당 제주도당위원장이 되고, 그는 1956년 6월 야간 초급대학 과정인 배성의숙培聖義塾을 설립, 운영자로 활동했으나 운영난으로 1958년에 제주대학 2부로 흡수되었다.

 

1960년 4·19 직후 7월 27일 실시한 초대 참의원參議院의원 선거 때 제주도 선거구에서 출마 21,362표를 얻었다. 이듬해 5·16 군사 쿠데타로 의회가 해체되어 의원직을 상실하였다. ※(필자의 변) 1947년 제주농업중학교(6년제)에 입학하여 3도1동(제주-성안) 숙부댁에 하숙하고 있었다. 그 집 앞에 협신제약주식회사 사무소에 사장 강경옥이 서울에서 1년에 한두번 다니고, 약사는 서울약전 출신 김관용金寬容(황해도 송림 출신)이다. 이 회사는 성산포와 한림항에 적산敵産공장이 있어 옥도沃度를 생산하는 상태였다.

 

강계돈康季敦:1915(일제강점기)~?, 본은 신천, 교육자, 구좌읍 행원리<어등-개> 태생, 서울에서 휘문고보徽文高普를 졸업, 서예와 음악에 달인,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당시 법무장관인 강금실康錦實(여)의 부친이다. 1950년 ‘제주유지濟州有志사건’의 의혹을 받던 인물, 1933년 배재고보를 졸업, ☆앞서 제주도유지들이 ‘인민군환영 준비위원회’를 몰래 가졌다고 하여 제주사회는 충격 속에 빠졌다. 이를 밝혀보니 계엄사의 정보과장 신인철申仁徹과 이응화, 강계돈 등을 계엄군에 구속, 신인철은 군재軍裁에 회부되고 이李와 강康은 민재民裁에 회부되어 유죄를 선고받았다.

 

강康은 항소하여 무죄로 풀려나자 경북 경주시로 이주하여 딸 강금실을 낳아 후일 서울로 옮겼다. 구좌중앙과 김녕교의 교사, 1939년 광주사범 강습과 1년 과정 수료, 1939년 애월교와 추자교 교사로 재임했다. 전하기는 향리의 모사謀士 이응화李應華의 진언으로 미군정청에 의해 제주농중 교감으로 임명됐다.

 

※(필자의 변) 나는 일제강점기이자 민족저항기인 1941년 애월공립국민학교에 입학하여 강계돈선생을 처음 만날 수 있었다. 선배들은 흔히 말하기를 ‘콧대 붉은 요시나가<吉永>’라고 불렀고 음악과 서예에 뛰어나 교장 야마나카-사타치<山中貞治>에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붓글씨와 음악솜씨에 특출한 멋쟁이었다. 후일 제주농업중 교감으로 들어와 먼저 학교 현관 높은 벽에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네 글자를 커다란 붓으로 써서 6·25까지 보존 중이었다.”라고 한다. 후일 그의 딸 강금실은 노무현 정부 때 법무장관을 역임한 여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