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호
  • 승인 2003.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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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가장 춥다는 대한으로부터 보름 안팎 쯤에 입춘이 든다. 이 무렵 한겨울이 봄으로 바뀐다. P.B.셸리가 서풍부(西風賦)에서 노래했듯이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다.

입춘이 지나 또 보름쯤이면 대동강도 풀리는 우수(雨水)요, 다시 그만큼 지나 3월 초순이면 개구리마저 놀라 깨는 경칩(驚蟄)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봄이 무르익으면서 새싹이 돋고 온갖 꽃들이 화사하게 피어난다. 여름의 녹음과 가을의 결실을 위한 생명체들의 일대 잔치이자 환희다.

그래서 동서고금 인걸들도 봄을 좋아했는지 모른다. ‘계절 중 유쾌한 왕자’라고 봄을 극찬한 T. 내쉬나, ‘봄은 사랑의 계절’이라고 읊은 H. 하이네, 그리고 ‘치장한 여인’이라고 표현한 이효석도 춘삼삭(春三朔)을 정말 감미롭고 즐거운 계절로 찬탄하고 있다. 특히 조선 고종 때의 가인(歌人) 박효관 같은 이는 “아희야, 새 술 많이 두어라. 새 봄 놀이 하리라”며 풍류를 즐겼다.

그러나 ‘봄 같지 않은 봄(春來不似春)’도 있다. 주위가 스산하고 국내외가 어수선하면 봄이 와도 봄 같을 리가 없다. 이러할 때 봄은 유쾌한 왕자도, 사랑의 계절도, 치장한 여인도 아니다. 새 술 많이 두어 봄놀이할 계제도 못 된다. 그저 ‘봄은 왔으나 봄 같지 않은 봄’일뿐이다.

올해는 예년과는 달리 입춘 꽃샘도 없이 비교적 따스했다. 우수를 전후해서 봄비도 알맞게 내려 만물의 소생을 재촉했다. 그러면서도 화창하게 맑은 날이 많아 봄다운 봄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올 봄은 봄이되 봄이 아니다.

지난 18일 200여 명의 사망자와 수백명의 부상.실종자를 낸 참담한 대구지하철 방화사건은 우리들로부터 봄을 앗아가 버렸다. 이와 때를 같이해서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방범죄 또한 우리를 당혹케 한다.

남한의 새 대통령 취임식을 눈앞에 두고 북한이 동해에서는 미사일 발사, 서해에서는 전투기 북방한계선 침범을 서슴없이 저질러 오싹하게 만든 것도 봄을 봄답지 않게 한 일 중의 하나다. 대북송금 특검법안 국회 통과로 앞으로 수사를 받는 관련자들은 정말 살얼음 같은 기분이 될 것이다. 춘삼월에 벌어질지도 모를 미국-이라크 전도 봄 맛을 가시게 한다. 무고한 인명이 희생될 테니까 말이다.

무엇보다도 감귤대란을 겪는 농촌은 봄을 더욱 무색케 한다. 꽃 향기 대신 감귤 썩는 냄새가 그러하며, 새싹 대신 부패과를 내다버린 들판이 그러하다. 겨울이 와도 봄은 멀 수 있고, 봄 아닌 봄도 있을 수 있는 게 아마 인간사인 듯하다. 봄을 봄으로 느낄 수 있다면 참 행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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