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지에 따라 처신을 가볍게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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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동수 편집국장
‘민주화 성지’ 글 삭제를 놓고 경찰청장과 치안감의 이전투구를 보면서 최근에 접했던 ‘불멸의 이노베이터 덩샤오핑’이 떠올랐다.

주목했던 부분은 마오쩌둥(毛澤東)과 덩샤오핑(鄧小平)이 극한상황에서의 처신이었다. 마오는 문화대혁명으로 덩이 실각하였을 때 덩의 모든 직위를 박탈하면서도 공산당 당적만은 그대로 유지토록 했다. 이 과정에서 마오의 고민은 깊었다. 그의 4인방(四人幇, 江靑ㆍ王洪文ㆍ張春橋ㆍ姚文元)이 집요하게 덩의 제명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덩은 공산당적을 유지했기에, 후에 그의 별명인 부도옹(不倒翁)처럼 재기해 ‘흑묘백묘론’을 앞세워 중국을 개혁ㆍ개방의 길로 들어서게 해 오늘의 중국을 만들었다.

▲덩이 실각해 트랙터 공장의 직공으로 3년 4개월 동안 유배 생활을 한 적이 있다. 이때 그는 ‘부총리’ ‘부주석’ 등 모든 직위를 박탈당했으므로 다른 직공들로부터 ‘덩형’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신분이 급전직하한 상황에서 비보까지 전해졌다. 베이징대에 다니고 있는 큰아들이 반신불수가 되었다는 소식이다.

홍위병들로부터 ‘반동분자의 아들’로 찍혀 자아비판과 폭행, 학대에 시달리다 대학 건물 옥상에 올라가 “나의 아버지는 죄인이 아니다”라는 문구를 남기고 투신했다가 허리를 심하게 다친 것이다. 이때 덩은 아들의 치료를 위해 마오에게 매달리기로 했다. 비록 마오가 자신을 비참한 지경으로 몰아낸 장본인이긴 하지만 아들을 위해선 다리 가랑이 사이라도 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펜을 들어 편지를 썼다. 마오는 이에 중국 최고의 의료기관을 알선해 주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들은 적절한 시기를 놓쳐 영영 불구의 몸이 됐다. 덩은 그래도 마오에게 등을 돌리지 않고 서신을 왕래했다.

▲덩에게도 기회는 왔다. 그가 복권되자 대륙은 사실상 그의 천하가 되었다. 하지만 맨 처음 한 일은 ‘살생부’ 대신에 ‘회생부’ 를 만들었다. 자신처럼 숙청당한 인사들의 복직과 복권을 위해서다.

마오가 사망한 후에도 덩은 마오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마오는 중국 공산당 혁명의 아버지로서 그 공로가 과오보다 훨씬 많으므로 공적이 먼저고 과오는 그다음이다”라고 평가했다. 이른바 ‘공칠과삼(功七過三)’이다. 그러면서 마오 격하운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했다. 그는 베이징 천안문광장에 걸려 있는 마오의 초상화도 철거하지 않았다.

▲ 경찰 수뇌부의 진흙탕 싸움에 행자부 장관까지 나섰다. 극히 이례적이다. 경찰 내부에서는 동반 퇴진하라는 목소리도 나왔다. 자승자박하며 물귀신 작전을 쓰는데 이 말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마오와 덩은 처지에 따라 가볍게 처신하지 않았기에 오늘도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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