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건 항일투쟁 인정 못받은 비운의 독립투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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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돌 선생 재심서도 탈락...유족들 속 타들어간다
▲ 제주의병항쟁의 주역이지만 독립유공자에 오르지 못한 김재돌 선생 아들 김영규씨가 14일 제주시 사라봉 모충사 의병항쟁 기념탑에서 부친의 이름을 가리키고 있다.


제72주년 광복절을 맞이했지만 목숨을 걸고 항일 투쟁을 벌인 인사들이 공훈을 인정받지 못해 유가족들의 애를 태우고 있다.

▲김재돌 선생 재심에서 탈락=1909년 제주시 광양벌에서 봉기한 제주의병항쟁은 도내에서 일어난 최초의 항일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27세 젊은 나이에 선봉에 선 김재돌 선생(1882~1956)은 체포에 나선 일본 경찰을 피해 담장과 초가를 넘어 탈출했다.

‘초가를 뛰어 넘은 장수’라고 불렸던 그는 대정읍에서 거처불명의 생활을 하다 일본으로 도주했다. 광복이 된 후 귀국한 그는 12남매를 뒀다.

그의 막내아들이자 유일한 혈육인 김영규씨(72·제주시 일도1동)는 2008년부터 부친의 공적을 국가보훈처에 제출했다.

김재돌은 아명(兒名)으로 항거 당시에도 불렸던 이름이지만 호적에는 ‘김문우’라고 오르면서 심사에서 번번이 탈락했다.

제주항일인사실기(2005년), 이도2동 동지(2009년), 김상오 제주시장의 확인서(2014년)을 비롯해 부친을 알고 지내던 동광양 고향주민 5명의 인우보증서를 제출해도 소용이 없었다.

지난 1월 보훈처는 공적 재심사에 들어갔으나 동일인 여부에 대한 소명자료가 부족하다며 지난달 유공자 선정에서 부결시켰다.

김씨는 “아버지를 포함해 많은 독립투사들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본명이 아닌 아명이나 가명을 사용했다”며 “동네 주민들이 ‘김재돌’이라고 불렀고, 김재돌과 김문우는 동일인이라는 기록도 있지만 명예를 찾지 못해 안타깝다”고 호소했다.

제주의병항쟁 주동자는 김재돌 선생 등 15명이지만 지금까지 4명만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돼 훈·포상을 받았다.

▲독립투사 사상 검증 여전=도내 독립운동 중 최대 규모인 1919년 조천만세운동으로 29명이 기소돼 14명이 옥고를 치렀다.

휘문고보 4학년 김장환 선생은 독립선언서를 갖고 귀향하면서 항일운동에 불씨를 지폈다.

그는 재혼을 하면서 평양으로 거주지를 옮겼고, 광복과 함께 남·북이 분단된 후 남한으로 내려오지 못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광복 후 초대 조천면장을 지낸 김시범 선생(1890~1948)도 그 중 한명이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주모자로 1년의 징역형을 살았으나 1947년 사회주의계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에서 부의장으로 추대됐고, 4·3이 발발한 후 의문의 죽음을 당하면서 애국지사가 되지 못했다.

독립운동단체의 명부와 판결문, 기관지 및 신문에 보도된 기사, 정보기관의 보고서에서 제주지역 독립투사는 500여 명에 이르지만 현재까지 161명(32%)만 훈·포상을 받았다.

유공자들의 계열을 보면 법정사항쟁이 23명으로 가장 많다.

이어 학생독립운동(23명), 일본방면 항일운동(21명), 3·1운동(18명), 제주천주교사건(13명), 혁우동맹(10명), 제주농민조합(10명), 해녀항쟁(3명) 등이다.

광복회 제주지부 강혜선 사무국장은 “공적이 있는데도 입증이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제주 출신 20여 명은 독립유공자 선정에서 번번이 탈락하고 있다”며 “고령의 된 후손 대신 보훈당국이 먼저 입증자료 찾기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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