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산김씨 입도조인 김윤조가 타계하자 제자들이 김녕리 궤살메 남쪽 능선에 묘역을 조성했다. 제주의 몇 안되는 고려시대 방묘로 역사적 가치가 높다.

▲유서 깊은 김녕 마을
김녕은 고려시대부터 15개 현 중 하나의 마을로 사서(史書)에도 많이 거론된다. 15세기 관찬(官撰)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김녕과 귀덕 등지에서 영신맞이를 한다고 했고, 입산악에 봉수대가 있으며, 김녕수(藪)의 둘레가 50리나 된다고 했다. 현재에도 영등물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고 영등굿이 전승되는 것으로 보아 예로부터 김녕은 영등신앙이 중요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녕수는 김녕곶의 지도 표기다. 그 천연림 규모가 웅장하여 생태적 자연의 보고(寶庫)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김녕곶은 예전의 천연림은 볼 수가 없다. 곶을 파헤쳐 길을 내어 골프장을 만들었고, 드라마 촬영지로 파괴된 후 땅마저 점점 사유지로 변했다. 풍력발전기를 곶 안에 세우면서 제주에서 가장 숲이 아름다웠던 김녕의 자연은 지울 수 없는 문명의 생채기를 입게 되었다. 한순간에 이익에 눈먼 사람들이 어리석게도 실수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한번 파괴된 자연은 돌이킬 수 없다. 우리 곁에서 자연이 사라지게 되면 우리 인간도 끝내는 그 자연으로부터 재앙을 돌려받게 된다. 오늘날 제주의 전통 마을은 마을을 살린다는 명목으로 시골과 도시의 구분을 해체시켰다. 마을이 살아나기는커녕 자연마을의 급속하게 파괴되면서 돌, 바다, 들, 숲 등 제주다움, 모든 역사와 전통이 사라지고 있다. 고유문화가 없는 사회, 앞으로 두고두고 후회할 일만 남았다. 


대대로 오름과 마을은 상생했다. 마을의 모든 것이 오름에서 나오고 오름으로 돌아간다. 한라산으로부터 타고 온 정기가 김녕마을의 진산(鎭山)인 궤살미를 중심으로 모이고 오른쪽 가까이 입산봉이 마을의 청산(靑山)이 돼 시간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김녕 마을에서 보는 오름들은 한 시대의 삶을 말해준다. 마을 사람들은 흔히 요즘 부르는 묘산봉과는 다르게 궤살미, 궤살메라고 한다. 묘산봉이 고양이 오름과 같은 지명 해석을 다시 한번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 제주 고유어를 한자 차용한 표기인 묘산봉, 화산악, 고산악, 고산미봉 등으로는 자기 땅의 역사를 제대로 증명하지 못한다. 궤살미의 표고는 116.3m. 이 산기슭에 궤살미 남동쪽으로 김녕리에 정착했던 광산김씨 입도조 김윤조의 석곽 방묘가 있다.  

   
▲궤살미의 김윤조 묘역
궤살미는 온통 소나무로 울창하게 덮였다. 오름 자락에 붉은 황살(스코리아)이 곳곳에 비치는 것으로 보아 오름 전체가 붉은색 화산재로 이루어진 산임을 알 수 있다. 궤살미는 마치 오름 모양이 초가지붕처럼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 모양이다. 풍수에서는 이런 모양의 산을 금성(金星)이라 부른다. 산의 생김새[山形〕를 오성(五星)으로 구분하는데 금성(金星)은 완만하고 부드러운 반원을, 목성(木星)은 직선으로 손톱처럼 선 모습을, 수성(水星)은 울퉁불퉁 굴곡을 이룬 모양을, 화성은 마치 불꽃처럼 날카로운 산의 형체를 말하는 것이다. 금성이 맑으면 관운이 있어 문장, 충정, 지조가 있다고 한다. 


궤살미의 산세는 남서향으로 굼부리를 열고 누웠다. 오름 남쪽으로는 완만한 능선을 이루고 있어 볕이 잘 들고 바람을 모으기에 충분하다. 이 능선 남향을 살짝 동으로 비켜 광산김씨 김윤조 공의 묘역이 조성되었다.    


김윤조는 벼슬이 예부의(禮部議)로, 문간공(文簡公) 김광재(金光載)의 차남이다. 김광재의 자는 (子輿), 호는 송당거사(松堂居士)이다. 김광재는 고려 공민왕 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내면서 광산 김씨 가문을 빛낸 인물로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남이 흥조(興朝)이고 차남이 바로 제주 입도조가 된 윤조(胤朝)가 된다. 그러나 이색이 지은 ‘목은문고(牧隱文庫)’의 묘지명에는 김윤조가 보이지 않는다. 이색에 의하면, “김흥조는 뜻이 크고 기개가 있고, 벼슬이 중현대부 군자감(中顯大夫 軍器監), 수원·해주 부사(府使)를 지냈다” 문간공(文簡公) 김광재는 예문관 대제학에 이르렀다. 대제학은 고려후기에 처음 등장한 벼슬로 정2품직에 해당한다. 아버지는 고려의 명신(名臣) 김태현(金台鉉)이고, 할아버지는 영광부사(靈光副使) 김수(金須)이다. 

 

   
▲ 광산 김씨 입도조 김윤조 부부 석곽 방묘.

김광재의  둘째 아들 김윤조가 제주도에 낙향하게 된 구체적인 동기는 형 김흥조 때문이었다.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형 김흥조가 1368년 10월, 밀집부사 김정(金精), 조사공(趙思恭), 유사의(兪思義) 등과 신돈(辛旽)을 제거하려는 모의를 꾸몄으나 조사공(趙思恭)이 자신과 절친한 전임 홍주목사 정운에게 이를 고변하자, 정운은 제학(提學) 한천과 함께 시중에게 이 사실을 급히 보고했고, 시중의 보고로 이를 안 공민왕은 이들을 옥에 가둔 후 귀양을 보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신돈(辛旽)은 이들이 귀양 가는 데 몰래 부하를 보내 뒤쫓아가 피살했다. 형의 사건을 지켜본 동생 윤조는 충격을 받고 신돈으로부터 화(禍)를 피하고자, 몰래 이름을 일(逸)로 고쳐 호남으로 내려갔고 그 후 증조부가 순절한 탐라에 낙향하기로 결심하여 1368년 신돈 사건 직후 바다를 건너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에 정착했다고 한다. 만년에 김윤조는 한동리(漢東里)로 옮겨 살다가 타계하자 제자들이 김녕리 괴살메(묘산봉) 동남쪽 자락에 장지를 마련하여 오늘에 이른다. 


김윤조의 아들 견노(堅老)는 천호(千戶)를 지냈고, 손자 치남(致南) 또한 무과에 급제하여 아버지와 같은 천호 벼슬로 생을 마쳤다. 김윤조의 증손인 김계충의 벼슬은 예조정랑(禮曺正郞) 겸 충무위중부사직(忠武衛中部司直)이었다. 이후 김진용, 김명현 같은 당대의 명현이 배출되면서 광산 김씨 가문은 세세연연 번창했다.


▲김윤조의 방묘
김윤조의 무덤은 고려의 묘제인 석곽 방묘다. 이 직사각형의 방묘(方墓)는 사방에 현무암 판석으로 둘렀다. 특이한 것은 그 현무암 판석이 앞면과 측면 상단 부분을 눈썹과 같이 일정하게 양각(陽刻)의 선형(線型)을 이루게 했다는 점이다.


김윤조의 방묘는 직사각형에 가까운 봉분을 석곽의 호석을 두르고 있는데 공의 무덤은 배의 무덤보다 조금 크다. 공의 무덤 크기는 전면 250cm로 세 개의 판석을 사용했고, 후면은 264cm로 네 개의 판석, 좌측면은 464cm로 7개의 판석을, 우측면은 5개의 판석을 사용했다. 무덤의 높이는 앞면이 95cm, 후면이 45cm이다.  


배의 무덤의 크기는 전면 223cm로 세 개의 판석을 사용했고, 후면은 205cm로 세 개의 판석, 좌측면은 404cm로 5개의 판석을, 우측면은 4개의 판석을 사용했다. 무덤의 높이는 앞면이 90cm, 후면이 32cm이다. 현무암 자연석을 인공의 띠로 장식하여 자연미를 훼손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추구한 것은 공의 아픔을 아는 후손들의 갸륵한 정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인위적인 솜씨를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마치 대교약졸(大巧若拙)의 경지를 아는 까닭이 아닐까.    


이 김윤조의 방묘는 2003년에 제주도지방기념물 제60-1호로 지정되었다. 제주의 몇 안 되는 고려시대 방묘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석곽으로 두른 김윤조 방묘와 같은 양식이 그 하나요. 고조기의 방묘처럼 흙을 이용하여 방형 봉분을 쌓은 것, 이 두 종류가 그것이다. 그 후 현존하는 여말 선초의 방묘들은 주로 석곽을 이용했는데 이 방묘 양식의 기원이 바로 김윤조의 증조인 영광부사 傳김수의 방묘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