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비실 에어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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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30년여 년 전 일이다. 잠시 반포의 한 아파트에 산 적이 있다. 대입학원 강사 일과에 부대꼈던지 어느 저녁 아파트 현관 안으로 들어서다 맨바닥에 까무러쳐 난리를 벌였다. 갑자기 기색혼절(氣塞昏絶)했을 것이다. 가족에게 알리면서 119를 부른 게 경비원이었다. 구급요원이 손을 썼기로 고비를 넘겨 털고 일어났지만 졸지에 명(命)이 걸렸던 일이다.

그 후, 제사 퇴물을 경비실로 갖다 드리는 등 자연스레 친근한 관계로 발전했다. 위급한 상황에서 구원해 준 경비원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요즘 아파트 경비실엔 대부분 정년퇴직한 분들이 종사한다. 노경에 일을 찾아 나선 사람들이다. 경륜을 쌓은 이들로 품위를 지킬뿐더러 물정에도 밝다. 늘그막에 나선 일터라 봉사와 배려의 마음도 저버리지 않을 테다.

그리 녹록지 않은 게 세상사다. 여름철을 맞아 아파트 단지에 따라서는 경비실 에어컨 설치를 놓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 사례 하나.

발단은 경비실에 에어컨 설치를 반대한다는 전단을 뿌리면서다.

“동 대표 회장과 동 대표 등이 경비실에 에어컨을 설치한다고 합니다. 에어컨 설치를 반대합시다. 매달 관리비가 죽을 때까지 올라갑니다. 공기가 오염됩니다. 공기가 오염되면 수명이 단축됩니다. 지구가 뜨거워지면 짜증나서 주민 화합이 되지 않고 직원과의 관계 또한 파괴됩니다. 단지보다 큰 아파트에도 에어컨 설치를 해주지 않았습니다. 에어컨 설치를 주민의 이름으로 반대합니다.”

다른 주민이 이에 반대하는 전단, 〈추진자들께 드리는 글〉을 붙여 인터넷에 화제로 떠올랐다.

“…말 같지도 않은 이유로 인간임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단 한 번이라도 여러분께서 쓴 글이 경비아저씨들에게 그리고 글을 읽는 주민들에게 어떤 상처를 줄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경비 아저씨들도 누군가의 남편이고,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한 명의 소중한 인간입니다. 그늘 하나 없는 주차장 한가운데 덩그러니 있는 경비실에 지금까지 에어컨 한 대 없었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공기 오염이 걱정되신다면, 체육센터에서 운동을 하시고, 지구가 뜨거워지는 게 걱정되시면, 일요일마다 있는 분리수거 시간 잘 지켜서 하나하나 철저히 하십시오.

여러분이 쓰신 이기적인 글을 읽고 자라날 우리 동네 아이들에게 참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추진자 일동’이라는 단어 뒤에 숨지 마시고 당당하게 나오셔서 논리적으로 그리고 인간적으로 의견을 나누시면 존중하겠습니다.”

이로(理路) 정연한 비판에 네티즌들이 반응을 보였다. “속 시원하다.”

글은 힘이 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에어컨 설치 반대를 비판하는 가운데, ‘경비아저씨도 누군가의 남편이고,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한 명 소중한 인간’이라 한 데 이르러 가슴 뭉클하다. 그에 더해 ‘이기적인 글을 읽고 자라날 우리 동네 아이들에게 참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한 대목에서 더위에 시달리던 의식이 깨어났다.

어른이 아이들에게 보여 줄 게 이런 게 아닐까. 세상이 그렇지 못하니 어린아이들이 함부로 말하고 못된 짓도 본보며 배우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나’를 돌아볼 일이다. 어느 때보다 어른들이 자신을 성찰해야 할 가치 혼돈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 주변에 낯 뜨거운 일이 한둘인가.

비좁은 아파트 경비실은 후텁지근한 정도가 아니다. 한낮의 폭염 속에 화기(火氣)를 뿜어대니 숨 막힐 지경이다.

자신만 생각하고 남몰라라 하면, 이미 사람이기를 저버린 것이 된다.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으로 대우받는 법, 그게 세상 사는 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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