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고래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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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경/수필가

책 속에서 마른 꽃잎이 떨어진다. 일 년 넘게 책 속에서 세월을 보내며 얇은 종이처럼 가벼워졌다. 재작년 봄에 애월 바닷가에서 딴 유채꽃이 죽어 가면서 남긴 흔적이다. 해 질 무렵 형광색의 노란 꽃이 석양 풍경을 얼마나 애잔하게 만드는지 그 때 보았다. 이 마른 꽃 속에도 어둠속에서 요요하던 그 모습 숨어있다. 이 유채꽃이 피어 있는 바닷가에서 처음 현무암으로 된 고래를 만났다 이름은 붉은 고래지만 먹물 색깔에 가까웠고, 반쯤 물에 잠겨 있었다. 무료하게 느껴질 때면 가끔씩 이곳을 찾아왔다.

 

어느 날 고래바위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카페에 앉아 있었다. 모자도 쓰지 않은 어떤 남자가 햇볕을 정면으로 맞으며, 고래가 떠 있는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고민이 있는 걸까. 그렇지 않다면 긴 시간을 같은 자세로 서있을 수는 없었을 텐데. 바다가 시작되는 계단에 힘없이 앉아 있다가 비취색 바다에 자기를 놓아버릴  것 같았다.

 

눈앞의 잔잔한 바다를 끼고 도는 둘레길이다. 한담공원 아래 애월리 길을 걸어가다 보면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돌 형상이 있다. 고양이, 악어, 붉은 고래 이런 푯말들이 가던 길을 멈추게 한다. 그 중에 붉은 고래라는 이름의 표지판에 눈이 간다. 거기에는 ‘나는 보름에 한번 고래를 만나는 사치를 즐긴다’라고 쓰여 있었다. 고래를 만나는 것을 사치로 여기다니 이 글을 쓴 사람도 나처럼 고래를 좋아하게 된 것 같았다.


비가 많이 오는 날. 붉은 고래를 만나러 간 적이 있다. 바람은 우산을 꺾고 비는 사방으로 들이쳤다. 고래의 꼬리는 뭍으로 향하고 머리는 바다로 향한 채 금방이라도 몸을 뒤틀며 헤엄쳐 나가려는 듯했다. 세찬 비바람이 몰아치던  날, 파도는 고래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들쑤시고 있었다. 하지만 돌로 만들어진 고래의 몸은 헤엄쳐 달아날 수가 없었다. 평생 거센 물살을 홀로 견디며 살아야 하는 것이 고래의 운명일까. 나는 고래의 절망을 보았다. 어떻게 해도 살아있는 고래가 될 수 없는 현무암이 세찬 비를 맞으며 울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젊은 시절 나를 옥죄고 있는 속박에서 자유롭고 싶은 때가 있었다. 밤에는 항상 갈등하면서도 아침이면 결국 제 자리에 가 있곤 했다. 그 시절 붉은 고래처럼 한순간이라도 자유롭고 싶었지만, 제자리를 지켜 내려고 내 마음과 싸워야 했다.


어느새 날은 어두워지고 비가 세차게 내렸다. 하늘과 바다와 허공이 하나로 합쳐져서 암갈색으로 물들었다. 그 순간 나는 고래와 바다가 먹물같은 어둠 속에서 하나가 되는 광경을 목격했다. 해초더미에 묶인 고래가 자유롭게 움직이는 모습을 언뜻 본 것도 같았다. 어둠을 뚫고 고래는 아무도 모르게 드넓은 밤바다로 나아간 걸까. 아니면 물 밑으로 파고들어 심연의 바다 속을 헤엄치고 있을까. 아침이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정박해야 하겠지만 한순간의 자유는 누리는 것 같았다. 오랜 세월을 견디기 위해서 그런 일탈의 시간이 필요하겠지.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운명에 사로잡히듯이 고래도 그렇지 않겠는가. 파도와 세월에 닳아 그 형체를 바다에 돌려보내지 않는 한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막막한 인생살이에서 어느 한순간의 자유, 숨 쉴 수 있는 구멍은 필요하리라. 사람들은 저마다 자유로운 고래 하나쯤 가슴 속에 키우고 있을 것 같다. 붉은 고래가 어둠을 뚫고 바다를 향해 나아갈 때, 나 또한 한 몸이 되어 헤엄치는 것을 상상하곤 하였다.


어둠 속에서 고래를 만난 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집으로 향하곤 했다. 돌아오며, 책 속에 눌려있던 샛노란 압화를 떠올린다. 살면서 아름다웠던 시절. 붉은 고래를 만났던 순간도 이 마른 꽃처럼 영원히 간직하고 싶다.


나는 붉은 고래가 바다로 나가는 것을 보았기에 기쁘다. 비록 온전히 다 알지는 못해도 한순간 그 비밀을 엿보았다. 그래서 붉은 고래와 나는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다. 살아가면서 이런 인연들이 있어 긴 세월 견딜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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