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당(奇堂) 강구범 선생이 설립해 서귀포시에 기증한 기당미술관 전경.

 

   
 

강구범康龜範:1909(융희3)~1994, 재일본 사업가. 호는 기당奇堂. 본관은 신천, 서귀포시 법환동에서 한학에 몰두하던 강거석康巨石의 아들이다. 서예가 강용범康用範의 아우이다. 그는 6세 때부터 선친에게 한문을 배우고 11세 때에 전라북도 계화도界火島로 건너가서 친형과 함께 2년 동안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하에서 한문을 배우고 귀향하였다. 실은 숙부뻘에 해당하는 친척 강한준康漢俊이 구한말에 하와이로 건너가 재력을 이루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어 거금을 향리에 보내어 교회를 짓도록 하였는데 이 친척에 대한 선망이 컸다. 어린 구범은 교회에서 놀면서 그 친척이 성공한 실화를 듣고 자기도 성장하면 꼭 강한준과 같은 인물이 되고자 하였다.

 

기당의 친형 강용범(1891~1953)은 호가 수암修庵 혹은 소석小石이라고도 하며 평생 한문과 서예를 즐겨 필방택호筆房宅號를 무본재務本齋라 불렀다. 기당은 19세 때에 가출로 도일,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의 요청으로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존왕尊王사상에 철저한 배일파排日派인 선친이 그렇게도 미워하는 일본에서 자식을 살게 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해 가을 기당은 밭을 판 아버지의 돈 일부를 몰래 가지고 재차 가출로 도일渡日, 동경에서 막노동, 신문 배달, 공원 등을 했다. 일본어를 몰라 간다<神田>에 있는 금성錦城중학교 야간부 3학년에 적을 두고 반 년 다녔다. 그가 한 사업은 자전거 부품을 생산하는 고무공장으로써 1938년 일본의 대표적인 기업으로 성장, 일본마그네슘의 하청 공장으로 인정받기까지에 이르렀다.

 

기당은 1944년 일본군속으로 징발, 남양의 해군 기지에 배치되었으나 이듬해 패전으로 도쿄에 돌아왔다. 해방이 되어 재일조선인연맹은 히비야<日比谷>공회당에서 창립대회를 개최할 때 기당은 연맹 산하의 조선인상공회 회장, 또 과학기술협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1948년 6월 15일 조선해방구원회가 조련 산하로 조직되어 그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점차 조련朝聯이 좌경화되자 기당은 ‘자유주의 그룹’을 이끌고 조련을 탈퇴해 버렸다. 기당의 사업 수완은 대단하여 신천호모공업소는 날로 번창하였고 또 창고 임대업에 손대어 신천창고信川倉庫와 임대 맨션 빌딩을 경영하는 공립共立빌딩 등의 계열회사를 운영하고 불패의 자리로 굳혔다.

 

하지만 기당은 이미 일본 국적을 취득해 선친의 실망이 대단하였다. 부친의 회갑이 되는 1938년에 축하금으로 많은 돈을 보냈는데 아버지의 회답 편지는 이랬다. 편지에 “독수리는 썩은 쥐의 고기를 먹는다지만 깨끗한 봉황鳳凰은 그따위 것을 절대로 먹지 않는다. 봉황새는 스스로 걸맞는 것만을 따른다.” 아버지로서는 아들이 두 번에 걸쳐 가출한 데 대한 불평한 심기를 노출한 것이지만 보다 더 큰 이유는 우리나라를 빼앗아간 일본에서 번 돈을 보냈으니 썩은 돈을 받지 않겠다는 결연한 자세였다. 더구나 일본 제국주의를 끝까지 거부한 유학자 전우田愚의 문하에서 글공부를 하게 하였던 부친의 심정을 왜 아들은 헤아리지 못하느냐! 는 뜻이 편지 속에 담겨 있었다. 일본이 패전한 후 기당은 신천호모공업소를 재건하여 고무공장을 가동, 여행용 가방의 원단과 자동차의 바킹 생산에 총력을 경주했다. 1964년 동경 올림픽대회 수영경기장에 사용할 고무판이 신천제信川製를 사용하면서 일본의 일류기업 스미도모<住友>화학고무와 직거래가 트여 전일본에 알려지게 되었다.

 

기당은 1985년 9월 6일 마침내 42년 만에 그리던 고향을 찾았다. 부모님 묘소를 참배하고 자신의 사업에 성공한 내용과 세계 1백여 나라를 돌아보면서 체험한 바를 어버이 영혼에게 보고하였다. 그는 뒷날 자전적自傳的 수기에 이 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고향땅 제주도의 부모님 산소 앞에 무릎 꿇고 절하는 나의 뇌리에는 지난 70여년 세월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섬에서 손꼽히는 갑부의 집안에 태어난 나는 기우는 가세를 바라보며 17세 때 집을 뛰쳐나가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에서 겪은 가난한 생활, 결혼, 고무공장의 창설, 일경日警에 의한 까닭 없는 체포, 태평양전쟁 말기의 군속 응소, 공습으로 공장 소실, 그리고 일제의 패망과 아울러 겪은 공장 재건의 고초 및 남미南美 브라질, 파라과이 지역에 대한 투자와 철수 등 지난날의 발차취 하나 하나를 더듬어 보아도 다 표현할 수 없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허나 그것은 또한 나라는 인간을 차근차근 키워준 한 그루의 나무의 연륜과도 같은 것이었다. 오늘에 와서 곰곰히 회상하면 나는 이제껏 고향을 그리는 긴 여로旅路를 더듬어온 것이다. 구미문명을 동경하며 결행한 가출, 미 대륙으로 가는 꿈을 안은 채 일시 체재지로만 여겼던 일본 땅 정착과 사업, 그리고 일본 국적의 취득 등, 나의 인생항로는 변전變轉과 격동에 찬 나날이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내가 한결같이 지켜 온 신조는 어릴 적 투철하게 배워 익힌 유교의 가르침이다. 신의를 중히 여기고 도덕에 어긋남이 없는 삶의 방식이 나를 지탱해 주는 인맥이 되었다고 믿는다.

 

오직 오늘까지 나의 가슴속에 떨쳐지지 않았던 일은 임종조차 지키지 못하였던 부모님에 대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불효이다. 지금 여기에 오늘까지 내가 걸어온 ‘여로’의 일단을 적어 양친에게 바치는 보고로 삼고자 한다. 이로써 씻을 길 없는 불행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할 따름이다.” 1987년 그의 자서전 수기 ‘망향의 여로旅路’(내가 걸어온 78년:한글판)를 발간하여 동포들에게 읽기를 권했다. 그가 제주 도민에게 바친 해양과학연구원(함덕 소재)과 기당미술관(서귀포 소재)은 기당을 길이 기리게 하고 있다.

 

   
 

강군평康君平:1877(고종14)~1955, 제주도 천주교 신도와 신부의 항일활동에 가담. 본관은 곡산, 강재출康才出의 아들, 서귀읍 서귀리에서 태어나 부인 한막달라韓幕多羅와 함께 홍로성당 소속 신자로서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1942년 10월 24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육군 형법ㆍ해군 형법 위반으로 금고 10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 광복절에 독립 유공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앞서 1941년 10월 아일랜드인 선교사 3명 및 다른 천주교 신도들과 함께 일경에 체포됐다. 제주도 천주교의 항일 활동은 당시 천주교 신부였던 손신부孫神父 Dawson, Patrick와 서신부徐神父 Sweeney, Augustine, 그리고 나신부羅神父 Ryan, Thomas. 등 세 사람이 주도하고 있었다.

 

그는 1941년 7월경부터 9월 사이에 주변인들과 몇 차례 시국담을 나누던 중에 “인도차이나 반도에 얽힌 이해관계로 영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영ㆍ일 전쟁이 발발하면 일본이 패전할 것은 필연적이다”고 말하였다. 또 “일본은 3, 4년씩 전쟁을 해 보았자 아무런 소득도 없음으로 해서 이번에 중국의 장개석蔣介石에게 강화를 요청하였다. 독일이 패전하면 영ㆍ미ㆍ소 3대 강국이 일본을 공격할 터인데 그렇게 되면 일본은 위험하다.”는 내용의 발언을 하였다. 이 무렵 일본은 제주도를 중국에 대한 도양폭격渡洋爆擊의 발진 기지로 만들면서 도내의 반일세력을 색출 제거코자 하여 우선 적성국인 영국 국적의 아일랜드 사람 선교사들과 그들이 소속된 천주교회 조직을 탄압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와 같은 발언들을 제주사회에 알렸다.

 

   
 

강규언姜圭彦:1898(광무2)~1927(일제강점기), 기미 독립만세 당시 군산群山에서 항일활동 전개. 본관은 진주, 강우발姜遇發의 장남, 산남 중문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받아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 8월 15일 독립유공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앞서 1914년 중문에서 최대현崔大賢 전도인에 의해서 동향의 친구 강문호康文昊와 함께 기독교 세례를 받고 윤식명尹植明 목사의 지도로 전북 옥구沃溝군 개정開井면 구암龜岩리에 있는 기독교계의 사립 영명永明학교에 입학했다.

 

1919년 4학년 때 이 학교의 교사 이두열李斗悅, 박연세朴淵世 등이 주도한 만세운동 거사에 참여, 학생 김영후와 송기옥, 제주 출신의 강문호, 강규언 등은 기숙사 2층 다락방에서 독립선언서 7천장을 등사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각 지방에 연락, 동년 3월 4일 군산 장날을 이용하여 합세한 주민 500여 명과 함께 군산경찰서 등 시내 각 지역에 선언서를 배포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같은 해  3월 31일 광주지법 군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아 수감되었다.

 

출옥 후 더 공부하기 위해 평양의 숭실학교로 들어가 3학년 때 중퇴하고 모교인 영명학교의 교사로 재임, 1920년대 초에 모슬포에 광선의숙光鮮義塾의 설립에 동참하였다. 철저한 민족주의 교육과 기독교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윤식명 목사에 의해 설립된 학교로서 ‘광선光鮮이란 뜻도 조선을 광복한다’라는 뜻이라고 전해진다. 이 학교의 교사들은 강규언을 숙장塾長으로 하여 원용혁元容赫, 정동규鄭桐圭, 정을수鄭乙水 등 기독교 교인들이 교사로 활약, 특히 정을수(여)는 정동규의 누이로서 1924년 강규언과 결혼하여 부부 교사로 학교 발전에 헌신하였다. 1923년 7월에는 그의 모친 임수가任守家 여사가 중문리의 토지 90평을 희사하자 초가 8칸의 중문예배당이 건립되었으니 이는 아들의 예수교 세례를 받은 기념으로 이루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