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김씨 입도조 내력
경주 김씨 하면 대대로 감목관직을 세습한 것으로 유명하다. 거기에는 오위도총관 벼슬을 지낸 김만일의 큰 업적이 있다. 그래서 말의 고장하면 으레 제주를 가리키고 제주의 말하면 김만일이 쉽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과거 명문가였던 경주김씨의 근원은 멀리까지 거슬러 올라 간다. 경주김씨 입도시조(入島始祖) 김검룡(金儉龍)은 신라 경순왕 김부(金傅)의 넷째 왕자인 대안군(大安君) 김은설(金殷說)의 16손이다. 김은설은 벼슬이 시종 시랑이었고 고려조에 평장사에 이르렀다. 


입도시조 김검룡은 벼슬이 훈련원 도감(訓練院都監)으로, 그의 아버지는 조선 개국(朝鮮開國) 1등 공신(功臣)인 익화군(益和君) 김인찬(金仁贊)이다. 김인찬은 고려 충숙왕 5년(1336년) 병자년에 익화현에서 탄생, 자는 의지(義之) 호는 의암(毅庵)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1년 임신(1392) 7월 28일(정미)에 개국공신으로  ‘문하부(門下府)에 교지를 내려 배극렴(裵克廉), 정도전(鄭道傳), 이지란(李之蘭) (…) 김인찬(金仁贊)을 보조 공신 중추원사 의흥친군위 동지절제사 익화군(補祚功臣中樞院使義興親軍衛同知節制使益和君)으로 삼았다.’리는 기록이 있다. ‘추제집(秋齋集)’에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益和君金仁贊’이라 하여 벼슬이 좌의정(정1품)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경기(京畿) 광주목(廣州牧) ‘능묘’조에도 김인찬은 ‘개국공신(開國功臣) 익화군(益和君) 김인찬(金仁贊)’이라는 기록이 있다. 김인찬이 이성계와 처음 만난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이성계와의 인연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 구좌읍 종달리 경주김씨 입도조 김검룡 묘역 전경. 후손들이 관리를 잘해 마소가 좋아하는 ‘촐’이 싱그럽게 자라난다.

‘태조가 돌아오다가 안변(安邊)에 이르렀을 때, 비둘기 두 마리가 밭 가운데의 뽕나무에 모여 있었다. 태조가 화살 한 대를 쏘자, 비둘기 두 마리가 함께 떨어졌다. 마침 길가에서 두 사람이 김을 매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한충(韓忠)이고, 한 사람은 김인찬(金仁贊)이었다. 이들이 그 광경을 보고 감탄하기를, “훌륭하도다. 도령(都領)의 활 쏘는 솜씨여!”라고 하니, 태조가 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이미 도령은 지났다.”라고 하고, 두 사람에게 명하여 가져다 먹게 하였다. 이에 두 사람이 조밥(粟飯)을 지어서 올리니, 태조가 그들을 위하여 수저를 들어 밥을 먹었다. 두 사람은 마침내 태조를 따르며 곁을 떠나지 않았고, 모두 개국공신(開國功臣)의 반열에 참여하였다.’ 이와 동일한 내용이 ‘동각 잡기 상(東閣雜記上)-본조선원보록(本朝璿源寶錄)’에도 실려 있어 이성계와의 만남이 민간에 회자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검룡은 김인찬의 셋째 아들이다. 부인은 복성(福城) 문씨로 슬하에 용신(用信), 양(良), 광(光) 3남을 두었다. 김검룡이 제주도 입도 동기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조선 초기 정종(定宗) 말~태종 초에 감목사(監牧使)로 내도한 기록이 있고, 태종 2년(1401)년 양마(良馬)를 고향인 경기도(京畿道) 양근현(楊根縣) 마유봉(馬遊峰)에 보내어 헌마한 후 제주도지관(濟州都知管)이 되었다고 전한다.


당시 제주에서는 고씨와 문씨 집안에서 오래도록 세습되어오던 성주(星主)와 왕자(王子) 직을 자진 반납하므로 태종 4년에 제주토관직을 개혁하여 새롭게 좌우도지관의 직제를 설치할 무렵 김검룡은 제주도지관(濟州都知管) 직위를 그만 두었다. 당시 김검룡은 난을  만나 난세(亂世)를 개탄하고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제주 정의현 오조리(吾照里)에 정주하게 된다. 이후 김검룡은 서당을 열고 후학을 가르치면서 인재양성에 전념하자 그의 학문과 명성이 경향(京鄕)에 자자했다. 그가 별세하자 발견된 지석(誌石)에 풍상에 마모돼 그의 행적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문인 김충광(金忠光) 등이 치상(治喪)했다는 사실이 전한다.

 

   
▲ 김검룡의 현무암 비석. 현존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비석.

▲김검룡의 방묘
김검룡(金儉龍)의 무덤은 사방으로 한낮 흘러가는 구름을 배경 삼아 붉은 색의 배롱나무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초록의 물결이 간혹 부는 바람결에 스러졌다 일어난다. 김검룡의 방묘는 제주도 북제주군 구좌읍 종달리 속칭 분토전(分土田)에 조성되었고, 묘제는 음력 3월 7일이다. 그의 무덤은 고려시대 귀족의 묘형(墓型)인 방묘(方墓)이며, 자손 4대까지 그 형태가 이어졌다. 입도 2세 수의부위우군부사정(修義副尉右軍副司正) 김용신(金用信)의 무덤은 남제주군 표선면 가시리 산 38번지 번널오름 건좌(乾坐)에, 입도 3세 병절교위용양부위사직(秉節交尉龍驤副尉司直) 김계수(金季粹)의 무덤은 번널오름 건좌(乾坐)에 있다. 경주김씨(慶州金氏) 입도(入島) 4세 김자신의 무덤은 규모가 큰 방묘이다. 일제강점기 때 도굴을 막으려고 방묘 하단 부분에 시멘트로 막았고, 김씨 집안에서는 순번을 돌아가며 무덤 감시하며 지켰다고 한다. 짐자신의 산담은 마치 작은 성처럼 우람하게 둘러졌는데 우측에 신문(올레)을 트고 돌계단을 놓았다. 대체로 한 집안 혹은 한 지역의 무덤 양식은 전대(前代)의 형식을 많이 따르며 전승되기 때문에 어느 한 세대에 이르러 급격하게 새로운 형식으로 탈바꿈하기는 어렵다. 서서히 모방모형이라는 방식으로 부분적으로 변화를 주거나 서서히 바뀌게 되는 것이다.  


특히 김검룡의 무덤은 부인 복성 문씨 방묘와 더불어 원형(原形)이 변했는데, 20세기 후반에 후손들이 묘역을 정비하면서 방묘 사방에 견치석으로 석곽을 둘렀다. 부부의 방묘는   지미봉과 일출봉을 바라보며 고즈넉하게 누워있다. 두 무덤 모두 직사각형의 모양으로 앞 뒤 크기가 약 4m, 길이는 6m, 높이 150cm 전후이다. 묘역은 후손들이 관리를 잘해 마소가 좋아하는 ‘촐(꼴)’ 이 싱그럽게 자랐다.


경주 김씨 가문의 특징은 산담이 장대(壯大)하다는 데 매력이 있다. 아마도 대대로 감목관 집안을 이어 오면서 마소를 키웠기 때문에 부리는 사람이 많아서 노동력이 충분했다. 산담의 축조는 돌의 확보와 운반 때문에 전적으로 많은 노동력에 의지해야 하므로 대체로 경주 김씨 집안의 산담과 석물은 잘 갖춰져 있다.


사실 김검룡 무덤의 규모나 산담의 축조도 매우 웅장하게 느껴질 정도다. 산담의 길이는 앞 뒤 쪽이 26m 정도, 측면이 24m이다. 산담의 높이는 약 100cm, 산담의 넓이는 앞면이 130cm, 측면이 90cm 정도 된다.     


방묘 앞 좌측에 큰 현무암 비석이 서 있으나 워낙 기공이 크고 세월의 풍상으로 마모되는 바람에 글자를 한 자도 알아볼 수 없다. 비석은 측면으로 세워졌고 비석 양옆으로 하단에 현무암의 판석을 심어 비석이 쓰러지지 않도록 받치고 있다. 이 현무암 비석은 현존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비석이라고 할 수 있다. 현무암 비석의 크기는 높이 140cm, 넓이 70cm, 두께 14cm로 형태는 직사각형에 가깝다. 실제로 묘갈로 사용했는지, 혹은 표석으로 사용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세워진 위치로 보아 적어도 묘갈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바로 현무암 묘갈 뒤에는 융희(隆熙) 원년(元年)에 세워진 말각형 조면암 비석이 세워져 있고, 묘역의 석물들은 현대에 화강암으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