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3 때 월북해 김달삼과 함께 해주 인민대표자 회의 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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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이쿠노구
▲ 현재 일본 오사카 이쿠노구 내 한인타운 모습. 1934년 오사카에 한인 교포 15만명이 거주한 가운데 약 40%가 제주 출신들이었다.

강규찬姜圭贊:1910(융희4)~?(월북), 일본 오사카에서 전협全協의 항일활동, 제주읍인민위원회 부위원장, 분단 시대의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대정면 신도리<뒌-개>에서 태어나 향리의 제남濟南 김일영金日榮 훈장으로부터 한문을 배웠다. 김일영은 84세까지 살았으며,  문하생 중에서 다수의 항일 인사를 배출했다. 1933년 6월 일제에 의해 검거되었다. 해방 공간에서 제주읍인민위원회 부위원장,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를 결성, 부인과 함께 월북,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으로 뽑혔다. 6·25동란 때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며 두 아들 강희진과 강석진은 북한에 살아 강석진은 북한 선박공업부 선박무역공사의 과장으로 재임한 바 있다.

 

1927년에 창립한 신도소년단에 가입하였는데 2~3년 후 소년단은 신도청년단으로 발전하였다. 이 무렵 마을 바닷가 ‘거문 여’ 근처에 일본 화물선이 좌초되었을 때, 청년 단원들이 왜선倭船에 대한 적개심을 표출한 일이 있었다. 이를 사건화한 모슬포 경찰관주재소의 순사 오무라<大村:일본인>가 청년단 간부를 연행하였다. 이때 김승지金承址는 심한 고문을 받아 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이후 이들 청년 가운데 좌행옥左行玉은 중국으로 망명, 한인청년동맹과 조선공산당의 항일 활동에 몸을 던졌고 김희봉金喜奉과 김익휴金益休, 또 부태환夫泰煥 등은 투옥됐다.

 

그의 은사 김일영이 노환으로 타계하자 1938년 향리에 남아 있던 문하생들에 의해 ‘濟南先生 都訓長 金公日榮 記念碑’를 큰길가에 세웠는데 문제는 비문 상단에 음각된 태극 마크 표시가 배일사상을 고취하였다고 하여 철거 지시를 받았다. 이에 앞서 그는 1931년경 일본 오사카 천마天馬방직에서 노동을 하면서 일본 노동조합 전국협의회에 가입하여 노동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 1932년말 이래 ‘전협全協 섬유 노조 간사이<關西>지방 및 오사카지구 북(北)지부’의 책임자로 활동, 1933년 6월 일제에 의해 검거되었다.

 

조국의 해방 공간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하면서 제주읍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이 되고 이어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를 결성할 때 도당의 최고위원으로는 그와 함께 안세훈安世勳, 조몽구趙夢九, 김유환金?煥, 김용관金龍寬 등이 선출되었다. 4ㆍ3 사건 당시 부인과 함께 도외로 탈출, 김달삼金達三과 함께 소위 해주 인민대표자 대회에 참석하였다. 1948년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한국의 국회의원에 해당)으로 뽑혔다. 역시 부인 고진희高眞姬(제주읍 삼도리 태생)는 1946년 제주도 3ㆍ1절 시위 사건으로 체포되어 1947년 5월 미군정 재판에 의해 징역 5월형에 벌금 2천원, 집행 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강근매姜根梅(여):1920(일제강점기)~?. 여성 교육자, 애월읍 하귀리 진주강씨 댁에서 출생, 부모 따라 여학교 재학 중에 1940년 2월에 아이치현<愛知縣>심상소학교 교사시험에 응시하여 준교사准敎師 자격 면허증을 받았다. 그래서 동년 3월에 오카야마<岡山>현립 高梁高等技藝女학교(갑종 실업학교) 4년 졸업하면서 동시에 악기 전공 교사 자격증을 받았다. 이로써 애월涯月공립초등학교 교사로 발령하여 야마나카-사다치<山中貞治>교장의 자랑을 받도록 잘 가르쳤다. 제주교육의 몰이해沒理解와 여성비하女性卑下의 당시 실정에 너무나 아쉬움 속에 불과 재직 7개월 만에 음악지도 환경의 열악劣惡을 느껴 학교를 떠났다.

 

강근보姜根保:1926~1979. 제주시 용강동에서 태어났다. 1945년 제주공립농업학교 졸업하고 1947년~1950년 동국대학교 문리과대학 국문과에 다니다가 6?25전쟁으로 귀향하여 1959년까지 제주농업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1961년 동국대학교 문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1964년부터 제주대학 국어국문학과, 국어교육과 교수로 부임, 1972년 제주대학 국어국문학과장과 1977년 제주대학 국어전공과장을 거쳐 1979년 정년퇴임했다.

 

강근생康根生:1912(일제강점기)~?,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공산당의 항일 활동. 일명 강자윤康子潤, 본관은 곡산, 구좌읍 종달리에서 태어나 서당에서 글공부를 하고 1929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1933년 6월 29일 ‘오사카’ 지방재판소에서 징역 6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1935년 8월 30일 오사카공소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하여 복역했다. 앞서 1932년 5월 14일에 30여 명을 검거, 이때 배후 인물로 체포됐다. 1995년 현재 오사카 이쿠노구<生野區>에 살고 있고, 손자 강문향康文香은 대한민국 거류민단 오사카 이쿠노구<生野> 지부에서 활동 중이다.

 

1934년 오사카에는 한인 교포가 15만 가운데 약 40%가 제주 출신들이다. 당시 위원회에는 현호경玄好景(성산)이 책임자로 있고 조합부장에 강상호姜相鎬(제주시 월평), 문서 배포계 강주호姜周鎬(중문면 상예) 등이 노동운동을 통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과의 상호 유대를 가져 강근생은 공원으로 일하면서 1932년 4월 ‘전협 화학 노조 오사카지부 동지구’에 가입, 동 6월 이좌구李佐九(신촌)의 소개로 일본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오사카 니시요도가와구에 위치한 소진무림小津武林기업이라는 방직 공장에서 한국인 여공 36명을 무단 해고한데 대하여 1932년 4월 22일 파업 투쟁을 전개하였다. 출옥 후에도 동지구 책임자 현호경玄好景과 연락하며 활동하던 중 1933년 12월 7일 검거되어 12월 23일 기소되었다.

 

강금종姜金鍾:1917~1991, 소설가. 일본에서 계림鷄林동지회의 항일활동. 호는 문소文巢 혹은 소범素凡, 강모수姜毛遂의 아들, 제주시 삼양동에서 태어나 어머니 한정순韓貞順을 따라 전라남도 강진康津군 작천면 삼열리에 살았다. 1942년 10월 12일 대판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이듬해 충남 연기군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소설가로서 업적이 인정되어 1968년 충청남도 문화상을 수상했다. 1944년 만기 출옥한 후 누님이 살고 있는 사할린으로 건너가 임남철林南喆(충남 연기)이란 여성과 결혼하였다. 조국이 광복되자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읍 침산동으로 삶을 옮겼다. 이는 부인 임남철林南喆이 연기군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는 3세 때 아버지를 잃고  화북사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2세 때에 모친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大阪> 저사구猪飼區의 심상소학교 3학년에 다니다가 반년 만에 귀향, 삼양보통학교 4학년에 들어갔으나 가정이 어려워 5학년에서 자퇴하여 가사를 도왔다.

 

1936년 4월 고학할 뜻으로 혼자 또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점원, 신문배달, 공원工員 등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기독교청년회의 영어학교, 일본대학의 오사카전문학교 법과 야간부 별과別科 등에서 공부하였다. 1940년 1월 경판京阪상업학교 야간부 3학년에 입학하고 이듬해 졸업,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가졌다. 일본에 와서 동향 청년 김봉각金奉珏을 알게 되어 김병목金丙穆, 한만숙韓滿淑, 고봉조高奉朝 등과 회합하면서 조국의 독립을 성취하고자 계림동지회를 조직해 사상이론연구부 책임자와 회원의 교육관계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집회활동 때는 우리 말을 쓰되 일체의 문서는 기록하지 않고 비밀을 지킬 것을 신조로 삼았다. 그런데 1941년 2월 25일 조직이 일본 경찰에 발각됨으로써 체포돼 옥중생활을 했다. 조국이 광복되자 귀국해 교원과 기자 생활을 했다.

 

강기석姜琦奭:1822(순조22)~1878(고종15), 유생. 자는 공규公圭, 본관은 진주, 애월읍 금덕리<유수암流水岩> 강유빈姜愈彬의 아들로 태어났다. 1852년(철종3)‘김충암적려유허비’건립을 건의, 제주목사 백희수白希洙가 이를 세웠다. 당시 제주에 유배와 대정현 창천마을에 머물고 있던 추사 김정희金正喜를 찾아가 한 겨울 동안 합숙하면서 문하생으로 사숙하였다. 1858년(철종 9) 진사 시험에 합격, 제주향교의 도훈장을 지냈다. 그는 1874년(고종11) 1월 ‘효자 박계곤에 대한 찬양문’을 짓고 교육에 도움을 주었다.1873년 11월 면암 최익현崔益鉉이 제주 성안에 유배되어 윤규환尹奎煥 댁에 머물자 가끔 찾아가 교유하였다.

 

강기조姜基祚:1831(순조31)~1887(고종24), 무신. 제주판관. 본관은 진주, 강봉언姜奉彦의 아들이다. 1881년 무과에 급제, 1886년(고종23) 3월에 제주판관 이규서李圭瑞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동년 7월에 친상을 만나자 떠나고, 다음 해에 별세했다. 앞서 당시 제주목사는 홍규洪圭인데 1886년 5월 떠나자 그 후임으로 심원택沈遠澤이 부임하였다. 한편, 1886년 6월 도내에 콜레라가 크게 유행, 죽은 자가 수만 명이 되고 이 해 7월에 폭우가 쏟아져 인가와 분묘가 무너졌고, 남수구 홍문虹門도 무너졌다.

 

강기찬康箕贊:1903(광무7)~1956, 무정부주의 항일활동. 본관은 곡산, 강인홍康仁弘의 아들로 건입동<건들-개>에서 태어나 1927년 4월 무정부주의를 표방, 삼도리에서 고병희高秉禧 등과 독서회를 조직, 1929년 9월에는 인근의 여러 마을에다 야학을 세워 주민들에게 민족정신과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 교육사업을 벌였다.


1930년 6월 일본 경찰에 잡혀 1930년 12월 8일 광주지법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1931년 7월 1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또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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