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무니 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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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업 논설위원
조선 인조 때의 학자 홍만종이 지은 순오지(旬五志)엔 박쥐에 대한 설화가 실려 있다. 박쥐의 이중적인 행동을 꼬집으며 사람들의 책임 회피를 풍자하는 내용이다. 새들의 왕이라고 할 수 있는 봉황의 환갑잔치에 오직 박쥐만 빠졌다. 자신은 새가 아니라 네발 달린 짐승이란 핑계를 대고 가지 않은 것이다.

얼마 뒤 기린의 축수(祝壽) 잔치가 열렸다. 이번에도 박쥐만 불참했다. 새처럼 하늘을 훨훨 날 수 있어 짐승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결국 박쥐는 하늘을 나는 새와 땅에서 사는 짐승 모두에게 따돌림을 받았다. 이후 갈 데가 없어진 박쥐는 동굴에 숨어 살며 남이 안 보는 밤에만 밖에 잠시 나오게 됐다는 얘기다.

▲사람이 일을 하다 보면 잘못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뻔뻔한 태도로 일관하는 이들이 적잖다. 여기서 책임은 알아서 해야 할 임무나 의무를 말한다. ‘잘 되면 제 탓, 잘못되면 모두 조상 탓’이라는 속담은 일이 안 될 때 그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태도를 비꼬는 말이다.

흔히 어떤 일에 책임을 지지 않고 슬쩍 발을 빼는 행위에 대해 ‘꽁무니를 뺀다’고 표현한다. 슬그머니 피해 물러난다는 의미다. 이때의 ‘꽁무니’는 엉덩이를 중심으로 한 몸의 뒷부분의 명칭이다. 사물의 맨 뒤나 맨 끝을 지칭할 때도 쓴다.

▲최근 제주정가가 시끄럽다. 제주도의회의원 선거구획정위원들이 총사퇴로 도의원선거구 획정 논의가 전격 중단돼서다. 사상 초유의 사태다. 현재 도내 29개 지역구 선거구 중 제6선거구(삼도 1ㆍ2ㆍ오라동)와 제9선거구(삼양ㆍ봉개ㆍ아라동) 등 2개 선거구가 헌재의 인구 상한기준에 위배된다.

이에 따라 내년 6월 지방선거를 치르기 위해선 오는 12월 12일까지 2개 선거구를 분구한 선거구획정안이 확정돼야 한다. 이제 100여 일 남짓 남았다. 허나 해당 업무를 맡고 있는 선거구획정위가 ‘올스톱’됐으니, 그야말로 비상 상황이다.

▲사실 이번 사태는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지난 7월 제주도ㆍ도의회ㆍ지역 국회의원 3자 회동에서 사전 양해도 없이 선거구획정위가 우여곡절 끝에 마련한 ‘도의원 2명 증원안’이 백지화됐기 때문이다. 한데 선거구획정 문제가 시간과 예산만 낭비한 채, 돌고 돌아 획정위로 다시 넘겨졌으니 어찌 분통이 터지지 않겠는가.

그 과정에서 국회의원과 제주도 등은 관련 법 개정이 힘들다며 사실상 도의원 선거구획정 논의에서 발을 뺐다. 국회 설득이 어렵고 시간이 촉박하다는 이유 등에서다. 그럼에도 그 책임을 놓고 정치권 일각에선 ‘남 탓’만 하고 있다. 개탄스러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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