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 속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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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한여름 폭염의 연속은 고통이다. 혹서(酷暑)란 말은 혹한(酷寒)에 비해 낯설다. 찜통이다, 불볕더위라 하지 혹서라곤 좀처럼 않는다.

한데 올여름은 펄펄 끓는 더위라 말대로 혹서다. ‘하늘에서 잉걸불을 쏟아붓는 것 같다’고 빗댈 지경이다. 손 하나 까딱 않고 앉아 있어도 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정말 후텁지근하다. 머릿속이 하얗게 지워지고 정신이 흐리멍덩하다. 무슨 생각을 하다가도 가닥을 놓쳐 헷갈리니 가만있는 게 상책이다.

밤도 연일 열대야라 지속적으로 뒤척인다. 자연의 바람을 예찬하는 푼수로 체면 구긴다고 여태 에어컨을 켠 적이 없었는데, 올여름은 아니다. 7월 중순 들어 백기를 들고 말았다. 밤낮 더위에 부대끼는 판국이니 글 한 줄 쓰기도 쉽지 않다. 손에 땀을 쥐고 앉아 자판을 두드려 본들 글이 나오랴.

뭐든 극한에 이르면 한번 뒤틀게 되는가. 앞마당 멀꿀나무 그늘에 앉았다가 발끈했다. 폭염 속에 일을 저지르기로 한 것. 아무리 폭염이라 하나 이렇게 주저앉을 수 없다는 담대한(?) 기세가 치고 나오는 게 아닌가.

선크림을 흠뻑 바르고 챙 너른 모자로 무장해 전정가위를 들고 나섰다.

볕을 무릅쓰고 들어선 게 텃밭이다. 열두 그루 고추나무에 달라붙어 수액을 빨아먹고 있을 노린재가 퍼뜩 떠올라서다. 모질고 냄새 고약한 놈이다. 가까이 바짝 붙어 앉는다. 하오 두 시의 열기가 훅 얼굴에 끼얹고 땀이 방울방울 흘러내린다. 땀이 눈에 드니 따가워 눈물이 나 뒤범벅이다. 예닐곱을 포획했다. 며칠 수색전을 펼친 성과가 있어 개체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매일 두세 차례 잡았더니 며칠 뒤 두 마리로, 또 하루 이틀 지나 한 마리더니 마침내 자취를 감췄다. 시달리던 고추나무에 고추들이 주렁주렁 달린다. 빨갛게 가을로 익어 갈 것이다.

마당 구석에 늙은 유자나무가 병들어 줄기와 잎에 허연 곰팡이가 닥지닥지 눌어붙었다. 일찌감치 열매를 포기한 게 가엾다. 방제 경험이 있을 턱이 없다. 궁리 끝에 나무에 다가가, 병든 삭정이를 쳐내고 수세미로 잎을 닦아냈다. 열기 속에 곰팡이가 날려 곤혹스러웠지만, 나무만 생각하기로 했다. 짐작건대 불볕에 처치하면 소독 효과가 있을 것 같다. 썩어들던 가지와 마른 잎들을 골라냈더니 나무가 엉성하다. 나무에 호스를 들이대 물을 세차게 뿌려 주었다. 살맛났을 테다. 살리고 보자 한 뜻이 먹힐지는 모른다. 불볕에 곰팡이가 타죽는 걸 지켜보고 있다. 나무도 내 뜻을 알아 버틸 것이다.

땀을 훔치며 또 텃밭에 가 있다. 5월 초에 토종물외와 호박 모종 하나씩을 심었더니 우쭉우쭉 자라며 기세 좋게 벋는다. 물외는 줄기를 내면서 이웃한 고추나무 지지대 위로 휘감아 오른다. 줄기가 여러 갈래인 걸 보며 왕성한 번식력에 혀를 찬다. 호박도 서너 개로 가닥을 내며 주변을 장악하더니, 한참 떨어진 주목 우듬지까지 타고 오른다.

사람은 덥다 투덜대는데 녀석들은 마땅한 때를 만난 모양이다. 가만 살폈더니 놀랍다. 아니, 이것들이 샛노랗게 꽃들은 피우면서 열매가 하나도 없지 않은가. 물외도, 호박도 한통속이다. 이 더위에 아침저녁 물주며 기다렸는데 이럴 수가….

농사에 익숙한 사람 말에 어처구니가 없다. “모종을 심은 사람에 따라 열매가 전혀 없기도 합니다.” 열매가 안 열린 것, 이게 우연한 게 아니라 내 손을 타서 그런 거구나. 노각 몇 개, 늙은 호박 몇 덩이 흙 위에 떡 하게 자존심으로 앉아 있는 풍경을 그려 봤던 건데. 얼씨구, 김칫국부터 마셨다. 모두 걷어내 버렸다.

실험은 끝났다. 고추가 빨갛게 익어 가면, 유자나무도 기사회생해 발끈 겨울나기에 나서리라. 폭염 속 실험은 성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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