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기조姜基祚:1831(순조31)~1887(고종24), 무신. 제주판관. 본관은 진주, 강봉언姜奉彦의 아들이다. 1881년 무과에 급제, 1886년(고종23) 3월에 제주판관 이규서李圭瑞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동년 7월에 친상을 만나자 떠나고, 다음 해에 별세했다. ☆앞서 당시 제주목사는 홍규洪圭인데 1886년 5월 떠나자 그 후임으로 심원택沈遠澤이 부임하였다. 한편, 1886년 6월 도내에 콜레라가 크게 유행, 죽은 자가 수만 명이 되고 이 해 7월에 폭우가 쏟아져 인가와 분묘가 무너졌고, 남수구 홍문虹門도 무너졌다.


강기찬康箕贊:1903(광무7)~1956, 무정부주의 항일활동. 본관은 곡산, 강인홍康仁弘의 아들로 건입동<건들-개>에서 태어나 1927년 4월 무정부주의를 표방, 산북 삼도리에서 고병희高秉禧 등과 독서회를 조직, 1930년 6월 일본 경찰에 잡혀 1930년 12월 8일 광주지법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1931년 7월 1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또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앞서 문고文庫를 설치하고 주민들을 대상으로 계몽운동을 실시하였다. 이와 함께 동년 10월에 일제의 경제적 침탈에 대항하고자 소비조합을 조직, 운영함으로써 일본인의 상품 불매운동도 전개하였다. 그 뒤 1929년 9월에는 인근의 여러 마을에다 야학을 세워 주민들에게 민족정신과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 교육사업을 벌이기도 하였다.


강달순康達淳:1840년(헌종6)~1908년(융희2), 무신, 명월만호, 자는 후중厚仲, 호는 송헌松軒, 강세범康世範의 아들로 조천면 신촌리<숙군>에서 태어났다. 신홍석愼鴻錫 문하에서 수학하여 1886년(고종23) 무과에 급제, 1889년(고종26)에 명월만호를 역임하고 1981년(고종28) 찰리사 겸 목사로 부임한 이규원李奎遠은 민요民擾 후에 민심을 수습하고 민막民?을 없이 했다. ☆ 한편, 당시 각 소장所長 마필馬匹이 크게 줄었다. 실수를 조사하여 아뢰고 정직한 관원으로 이를 맡게 하는데 이때 강달순으로 하여금 이를 맡게 하였다.


강대원康大元:1926(일제강점기)~2015, 언론인, 구좌읍 하도리<별방>에서 면장 강공칠康共七의 아들로 출생, 동국대학 법정대를 졸업, 언론言論계를 출발하여 대학 신문주간을 거쳐 서울신문학원 부원장을 지냈다. 제주도노동위원회 상임위원과 제주청년회의소 제3대 회장을 역임했다. 제주대학 강사와 일본 한낭대학<阪南大> 객원교수를 지냈다. 저서 ‘세계신문 소사小史’, ‘제주해녀연구’, ‘구좌면지’. 등이 있다. 제주도공익상을 받았다. 말년에 서울에서 지내다가 노환으로 2015년 3녀인 의사醫師(도지사 원희룡元喜龍 부인)의 요양을 받던 중에 동년 8월 8일 영면永眠, 유족은 2남 4녀를 두었다.*필자의 변: 제주일고 교감으로 재직하던 1969년 11월 시행된 전국적 행사인 대학 예비고사에서 당시 교사들이 힘써주어 졸업예정자 모두의 성적이 매우 좋았을 뿐만 아니라 원희룡군이 전국 최고라는 발군의 성적을 올렸다.

 

나는 특명에 의해 우도중학교 교장으로 발령받았다. 너무나 기뻐 우도의 아름다움에 젖어 우도팔경牛島八景을 지었다. 당시 왕래자가 불과 몇 명이 다녔는데 이미 수년전 100만 명이 넘는 나그네들이 찾는 명소로 탈바꿈하였다. 원 군은 천재였다. 서울대 법대 수석, 사법과 고시 등 무사히 통과, 나는 후일 중문에 가서 그의 결혼식에 참석하여 친히 알고 지내던 장인이 될 강대원康大元 선생을 만나 신랑에게 전할 휘호를 전해주실 것을 부탁하고 돌아왔다. 서예가 근재謹齋 선생이 쓴 충무공의 말씀 ‘必死則生 必生則死’라는 여덟 글자이다. 정치가로 국회의원으로 제주도백으로 충무공의 유훈을 잘 지키고 있을 것이다. 강선생이 더 오래 살아 나와 함께 그의 앞을 지켜보았으면 너무나 좋았을 걸.


강도혼姜道渾:1816(순조16)~?, 서화가書畵家. 일명 강도순姜道淳, 자는 여천汝天, 호는 선다仙茶. 본관은 진주, 대정현 ‘대정-성안’에서 강대유姜大有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친형이 강도원姜道源이다. 강도원의 증손자 강문석姜文錫은 유명한 항일 운동가. 또 강문석의 사위가 김달삼金達三(본명 李承晋)이다. ☆앞서 대정성 안에 있는 추사적거지秋史謫居址는 본시 강도흔(순)의 부친 강대유의 주택지였다. 1840년(헌종6) 추사는 제주에 유배되어 귀양처에서 집 주인의 아들 강도흔(순)에게 글과 글씨를 가르쳤다. 추사의 문하생 가운데 글씨로 유명한 이는 강도흔(순), 박계첨朴季瞻(곽지), 김구오金九五(제주 성안)이다. 특히 강도흔(순)은 글씨와 그림을 잘 그렸는데 난초 그림이 특히 유명했다. 그의 글씨는 퍽 적어 현재 김현우金鉉禹가 소장 중인 ‘귀사야야歸思夜夜, 부진전우府陳田遇’가 오늘에 전해진다.


강만식康萬埴:1803(순조3)~1868(고종5), 자는 사직仕直, 무신, 무과 급제, 애월방호소 조방장(조선 말기 제주 지역에서 주장主將을 도와 적의 침입을 방어한 종9품 관직), 정의현감, 본관은 신천, 조천면 신촌리<숙군>에서 강성대康城大의 아들로 태어났다. ♣ 그의 시:제목=‘挽高先生’ 고선생을 보내며, 與君生此世:그대와 더불어 이 세상에 같이 태어나서/自少最相親:어려서부터 가장 친하게 지냈는데/講射同觀德:무예를 익혀 무과武科를 같이 보았고/居鄕共澤仁:고장을 위한 모든 일에 함께 힘썼는데/仙耶如夢境:꿈같이 한 사람은 신선되어 떠나가니/老矣失芳隣:한 늙은이는 좋은 이웃을 잃었네!/臥病不相訣:병들어 누운 몸이라 영결식에 참석도 못하고/?歌屬暮春:저무는 봄날 덧없는 노래 읊조리네!

 

강만영姜晩榮:생몰년 미상, 선비, 유생儒生. 본관은 진주. 강필헌姜必憲의 아들, 본시 재질과 문장이 뛰어났다. 1796년(정조20)에 그는 대정 유림의 대표로서 당시 대정현감 고한조高漢祚에게 대정서당 설립을 수창首創하여 성사되었다. 그는 이곳 서당 설립과 운영에 기여하였다. 이후 1799년(정조23)에 대정현감 부종인夫宗仁이 이곳 서당을 열락재悅樂齋라고 명명하여 편액을 걸었다.

 

강면규姜冕奎:1804년(순조4)~1862(철종13), 문신. 제주목사. 자는 주옥周玉, 호는 만와挽窩, 본관은 진주, 필헌必憲의 아들로 경상도 안동에서 태어났다. 1840년(헌종6) 문과 식년시에서 병과로 급제했다. 목사 강면규와 당질 강호姜鎬, 군관 이시우李始愚, 이계혁李啓奕의 이름을 새긴 마애명이 방선문에 남아있다.

 

강명옥康明玉:1909(융희3)~1965, 행정가. 법제실장. 교수. 본관은 신천. 서귀포시 법환동에서 강형은康亨殷의 아들이다. 국회의원 강경옥康慶玉의 아우이며 사업가 강용옥康龍玉의 형이다. ‘모모야마’중학교를 나와 후쿠오카<福岡>고등학교를 거쳐 일본 최고 명문교 동경제국대학 법학부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하였다. 1938년에 동경제대를 졸업하고 1941년 사법과마저 합격하였다. 1940년 2월 함경북도 직원, 1942년 3월 경북 의성군수와 청도군수를 거쳐 1944년 12월에 조선총독부 농산국 사무관으로 임명되었다. 해방 후 정부 수립과 동시에 법제처 법제과장으로 출발, 1950년 법제처 경제법제국장에 재임되었다.

 

그 후 법제처차장, 법제실장을 역임하였다. 1961년 이후 서울에서 변호사를 개업하였다. 아들 강대헌康大憲(1935년생)도 서울법대를 졸업한 후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사정위원이 되었으며 판사를 역임하였다. *필자의 변: 재일교포 강석범康龜範의 자서전 <망향의 여로>에서 “내가 존경하는 두 분이 있다. 곧 청빈으로 일관한 제주도지사 강우준康祐俊, 법제실장을 지낸 강명옥康明玉이다. 그가 노트를 보여주었을 때 지독한 공부벌레라는 것을 알아 놀랐다. 줄곧 공부만 한 입지전적立志傳的인 인물이다. 명문 동경제대東京帝大 재학 중에 고등문관高等文官시험에 합격한 수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