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시, 음악이 서로 손 잡고 춤추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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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솔동산 고영우갤러리
▲ 홍진숙 作 서귀포 고영우.

벌거벗은 나무

 

나목이 좋아

벌거숭이 나무가 좋아

나는 나목 보러 숲으로 가네

벗을 바엔 홀가분이

벗어버리는…

아무런 치장도 없이

모진 눈보라 서리 맞으며

봄을 기다리는

가느다란 숨 죽어 있는

앙상한 가지 나목이

나는 좋아라

 

-고성진 화백(1920~2016) 시 전문

 

 

 

솔동산로 6-1. 실바람 부는 작은 거리에 ‘고영우갤러리’가 있다. 시와 음악과 그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난장을 벌이기 위해 한 명 두 명 모여든다. 서귀포의 가을이 비로소 시작되고 사람들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만남을 즐긴다. 자그만 공간의 벽에는 20여 점의 그림이 걸려 있고 고영우 화백은 짙은 바다색 쟈켓을 입고 있다.

 

반백의 머리에 베레모를 쓴 김순이 시인이 난장의 시작을 알린다.

 

“바람난장은 모든 예술인들이 모여 서로의 장르를 이해하고 소통하는 자리입니다. 오늘의 만남으로 인해 서귀포의 밤이 더 아름다워지길 바랍니다.”

 

그녀의 음성은 낮으나 힘이 있어 우리의 가을밤은 절로 아름다워지고 있었다.

 

▲ 김미령 화가가 고영우 화백의 부친인 고성진 화백의 시 ‘벌거벗은 나무’를 낭송하고 있다.

흔들거리는 마음과 마음을 껴안아 주는 소프라노 색소폰 연주가 시작된다. 나종원 연주자의 「낭만에 대하여」를 들으며 어떤 이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어떤 이는 가볍게 몸을 흔든다. 색소폰 소리가 열린 문 사이로 들어온 바람을 타고 춤을 춘다.

 

이어서 낭송되는 두 편의 시를 감상하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만히 눈을 감는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한용운의 「알 수 없어요」 , 윤동주의 「자화상」 속에서 알 수 없는 세상과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낭송을 하는 김장명 시낭송가와 김정호 낭송가의 숨결이 고요하고 깊다.

 

▲ 고경권 연주자가 하모니카 연주로 ‘라노비아’를 선보이고 있다.

이쯤에서 우리는 김순이 시인이 쓴 고영우 화백의 그림 이야기를 듣는다. 송순웅 낭독가가 그의 이야기를 천천히 들려준다. 그래서 알게 되었다. 고영우 화백의 그림 속 자기 연민이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린 사람으로부터 바라보는 사람에게로 옮아가 자리 잡는다는 것을. 그리고 또 알게 되었다. 그는 신으로부터의 어떤 은총이나 구원에 대한 기대보다 신이 몸소 창조한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지극히 행복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문학을 하고 음악을 하고 미술과 무용과 사진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잘 놀기 위해 만나는 자리, 서로를 이해하고 소통하고 사랑하기 위해 만나는 자리인 바람난장은 밤하늘 별들처럼 잘 어우러져 반짝반짝 빛난다. 김미성 낭송가가 들려주는 윤봉택 시인의 「그날에」를 들으며 이금미 시 낭송가가 들려주는 박재삼 시인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들으며.

 

▲ 나종원 연주자가 색소폰 연주로 ‘낭만에 대하여’를 선보이고 있다.

시간은 저 혼자 흘러가는 것인가. 우리는 보내지 않았으나 길 건너 카페의 전등빛이 점점 더 밝아진다. 하모니카 연주가 시작된다. 고경권 연주자의 두 손은 하모니카를 감싸 쥐고 우리는 그가 연주하는 「라노비아」를 듣기 위해 귀를 모은다. 하모니카 연주에 이어 강은영 낭송가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가을 날」을 들려준다. 갤러리 안이 가을로 가득하다.

 

이어서 김미령 화가가 고영우 화백의 부친인 고성진 화백의 시 「벌거벗은 나무」를 낭송한다. 시인은 생전에 8권의 노트에 300여 편의 시를 쓰셨는데 그 중의 한 편이다. 이어서 신희숙 낭송가의 강영은의 「서귀포」, 김장선 낭송가의 박정만의 「저 가을 속으로」가 가을빛으로 익어간다.

 

그렇게 솔동산의 밤, 고영우갤러리의 가을은 그림과 시와 음악 이렇게 삼박자가 서로의 손을 잡고 윤무를 추며 시나브로 깊어갔다. 마지막 시 낭송은 정영자·오택중 낭송가의 듀엣으로 레미 드 구르몽의 「낙엽」. 이 시는 시몬이라는 환상의 여인에게 바치는 시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소리가’ 가을이면 이런 저음의 애수 띤 음성을 여인은 기다린다.

 

애타는 마음을 다독거리듯 이어지는 테너 색소폰 연주는 바람난장의 마지막을 가을 화폭에 옮겨 담는다. 연주를 하던 중에 김일형 연주자가 잠시 색소폰을 내려놓고 말한다. “여러분! 제주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제주도의 등대지기 역할을 하십시오. 여러분 모두가 제주도 예술계의 등대지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색소폰 연주자는 마지막 곡인 ‘오버 더 레인보우’를 연주한다. 우리 모두의 가슴에 불을 밝혀 주듯 깊은 호흡으로.

 

글=손희정

그림=홍진숙

사진=송순웅

진행=김순이

연주=김일형, 나종원, 고경권

낭독=송순웅

시 낭송=김장명, 김정호, 김미성, 이금미, 강은영, 김미령, 신희숙, 김장선, 정영자, 오택중

 

※다음 바람난장은 8일 저녁 6시, 우도 고래콧구멍 동굴에서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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